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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라이어티 - 오쿠다 히데오 스페셜 작품집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단편들의 콜라주로 완성된 기승전결
<남쪽으로 튀어>, <공중그네>의 오쿠다 히데오. 그의 단편과 대담을 엮은 책 <버라이어티>!
일본인 특유의 대놓고 거절하지 못하는(拒絶できない) 성격 때문에 쓴 글들을 엮었다. '보람'보다는 '체면'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는 말이 맞겠다. 재미있는 사실은 편집자의 능력인지 짧은 단편들이 만들어 낸 전체적인 메시지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개별적 특성을 가진 물건들이 만나 멋진 콜라주(collage)를 만든 느낌?!
이야기의 시작, 서론에 해당하는 <나는 사장이다>와 <매번 고맙습니다>에서는 처음 작가로 등단한 신인 작가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작가도 글을 써야 먹고사는 1인 기업이다. 흔히 작가라고 하면 근사한 책상과 펜을 들고 글을 쓰는 모습을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직업이다.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자신만의 회사를 차린 가즈히로. 거절하지도, 가격 흥정도 제대로 못하는 그는 기획기사나 잡지에 실릴 단편을 가볍게 거절하지 오쿠다 히데오를 연상시킨다. 두 편에서 중단된 단편 뒤에 곧이어 등장하는 잇세 오가타와의 대담에서는 그동안 작가로서 진짜 표현하고 싶은 것과 독자 혹은 편집자가 원하는 것에 대한 갈등, 그리고 진짜 말하고 싶은 속내를 슬쩍 드러낸다.
누구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지만 그래서는 물건을 만들 수 없다, 단칼에 베어 내고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그때 생긴 피는 고스란히 내가 받아 내니까 좀 봐줘.
서론에서 슬쩍 내비친 속내는 전개 부분에 해당하는 <드라이브 인 서머>, <크로아티아 vs 일본>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작가의 날 것 그대로의 심정이 읽힌다. 막힌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것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에 짜증 나기 시작한 노리오와 그것을 개념치 않는 히로코의 대비, 맥줏집에서 월드컵을 보며 흥분하는 사람과 아무 말이 없는 주인장의 대비는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묘사하며 상황에 따른 스트레스가 신랄하게 전달된다.
<더부살이 가능>에서 주목받는 큰 사건과 갈등의 중심은 교코 주변에서 일어난다.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듯 보이는 에이코는 교코 주변에서 서성이며 주변인인 듯 보이지만 결국 교코와 얽힌 관계로 더 큰 갈등을 예고하며 끝을 맺는다. 작가 스스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야마다 다이치와의 대담은 '모든 사람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라는 명제를 던져주며 지금까지의 단편들에서 고조된 감정과 장면, 사상을 새롭게 전환시킨다. 주목받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던 단편들. 당시에는 울며 겨자 먹기나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 휩쓸려 써낸 단편들일지라도 얼마 남지 않은 작가의 수명을 소비해가며 써낸 글들이다. 베스트셀러만큼의 가치는 아니더라도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단편들은 인생에 작은 추억이 된다. 각본보다 훌륭하게 연출하고 연기해줘서 더 실력을 얻어 가는 연기자처럼 어쩌면 이마저도 편집자의 기획의도에 떠밀려 오래된 원고를 뒤적거렸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었어도 그 추억을 독자들과 함께 한 번쯤 음미하고 싶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앞으로 16년 정도 남은 작가 인생에서 태어난 작품에 사사로운 정이 없다면 거짓일 테니까. 그리고 그런 삶의 단편 같은 추억들이 작가를 조금씩 성장시킨다.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세븐틴>과 <여름의 앨범>은 설렘과 두려움, 아쉬움이 교차하는 인생의 순간들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존재했던 작지만 가슴 떨리는 아름답던 시기는 조각조각 붙여진 작품에 대미를 장식하며 마지막 여운을 남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첫날밤을 가지려고 하는 소녀의 결심과 그것을 바라보는 엄마, 거추장스러운 보조바퀴를 떼어내고 두발자전거를 타기 위해 노력하는 소년의 작은 시작과 누군가의 끝을 알리는 죽음. 그의 단편들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인생이라는 커다란 천을 완성해 간다. '싫어, 싫어' 하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 넘어야 하는 그때 그 순간들. 과도하게 보람을 찾아야만 하는 특별한 상황은 어쩌면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내게 익숙한 광경이기 때문에 특별함을 느끼지 못하는 그 평범한 일상의 순간. 그 순간들이 삶을 더욱 풍요롭고 다양하게 성장시킨다. 휩쓸리지 않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나도 편집자의 기획과 의도에 맞장구치며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내 삶의 버라이어티는 어떻게 엮어가야 할까 생각해 보게 만드는 오쿠다 히데오의 삶의 조각들 <버라이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