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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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실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 들어온다. P. 10

35년 동안 지하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는 한탸. 그는 수백 톤의 폐지 속에서 그만의 눈으로 가치 있는 책의 소리를 듣고 모습을 가려낸다.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라는 문장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첫 장.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는 말은 '생각하는' 인간만이 의미 있는 문자로 표현된 책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 태양 내부의 격동으로 거대한 자장 고리가 형성됐다 사라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흑점.  태양 내부에 자장 고리가 생성되지 않는다면 흑점은 점점 감소할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책은 필요성을 상실하고 점점 소멸할 것이다.  세상에 쌓여가는 폐지는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세상의 이념, 생각, 관념들이다.  쥐들만 들끓는 아무도 없는 지하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압축기에 넣어 가공한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지식들의 종말을 지켜본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소멸을 위해 일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떠할까.  그는 자신만의 공간에 은밀하게 숨겨놓은 책들을 은퇴 후 압축기에 넣어 자신만의 꾸러미를 만드는 꿈을 꾼다.  그래도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사람에게서 남는 건 성냥 한 갑을 만들 만큼의 인과, 사형수 한 명을 목매달 못 정도 되는 철이 전부다. p. 25

세상이 변했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더 이상 세계는 다양한 지식 따위는 관심이 없다.  압축기는 거대해지고 한탸처럼 책을 선별하는 사람도 없다.  순식간에 책들은 의미 없는 육면체로 재빠르게 압축된다.  사랑하는 것들이 아무 의미 없는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을 묵도한 절망에 빠진 사내.  언젠가 자신의 책을 압축해 꾸러미로 만들고 싶어 했던 사내의 작은 소망은 사라졌다.  물을 뿌려 되직한 하나의 종이죽처럼 되어버린, 시끄러운 쥐들로 들끓던 지하실은 더 이상 그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한다. 잉크로 얼룩진 폐지가 아닌 백지를 다루는 곳.  더 이상 무엇을 발견할 수 없는 세대를 이야기했던 장강명 작가의 표백세대처럼 백지를 다루는 곳은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 그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영원과 무한을 추구한 돈키호테 같은 한탸.  나만의 책 꾸러미를 만들며 의미를 찾아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은 또 다른 한탸다.  밥을 먹듯 책을 읽고 똥이든 거름이든 무엇이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옮긴이는 '연민'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품을 파고들어 젖을 무는 아이처럼 본능적인 지에 대한 사랑, 앎에 대한 욕망만이 어제와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닐까.  조금씩 아껴가며 갉아먹듯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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