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요, 아빠랑 제가 그 놀이를 하게 된 건 선교사 지원품으로 목발이 왔을 때였어요....
(중략) 그 놀이는 그냥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든 기쁜 점을 찾아내는 놀이거든요. 아빠랑 저는 바로 그때부터, 목발을 받았을 때부터 그
놀이를 했어요...... (중략) 기쁜 점을 생각해 내는 게 어려울수록 더 재미있어요.”
인형 대신 목발을 받고 시작된 폴리애나의 기쁨 놀이. 삶에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감흥 없는 얘기다. 매사 감사하다는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지만 현실에 감사하기는 쉽지 않다. 폴리애나의 기쁨 놀이를 처음 보았을
때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런 식으로 기쁨을 찾는 일이 자기 합리화나 자기 위안이라 말한다 해도 반박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도대체 내 것이 아닌 기쁨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폴리애나는 지병으로 줄곧 침대에서 생활해야 하는 스노 부인에게 나머지 사람들이 건강하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말을 한다. 언뜻 들으면 황당한 얘기인데 이모집에서 일하는 낸시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읽으면 진짜 기쁨 놀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기쁨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모습에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진짜 기쁨은 나를 위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할 때에도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고로 다리를 다쳐 누워있는 폴리에나를 위해 마을 사람들은 기쁨 놀이를 열심히 한다. 기쁨의 주체가 내가 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네 기쁨이 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기쁨 놀이의 절정이었다.
내게 행복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있다면 매일 눈을 뜨자마자 내 행복을 가늠하러 온도계의 눈금부터 살필
것이다. 온도계의 붉은 막대가 보여주는 높이에 따라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순식간에 삶의 희비가 교차한다면, 삶의 온도는 오롯이
온도계의 몫이 되고 말 것이다. 온도계를 햇살 가득한 창가에 걸면 온종일 비스듬한 가장자리에서 비추는 무지개를 볼 수 있다는 폴리애나. 그냥
숨만 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콕콕 박히며 심장을 쿵쾅쿵쾅 두드린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아무 기쁨 없이 홀로 살아가는 어른들께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