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 한나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그래픽노블로 만나다
켄 크림슈타인 지음, 최지원 옮김, 김선욱 감수 / 더숲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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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다닐 때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다. ‘난 시스템은 믿지만, 사람은 믿지 않는다.’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예측 가능하며 실수하지 않는 컴퓨터 시스템이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고 지금껏 내가 가졌던 생각은 효율성과 경제성에만 초점을 맞춘 주입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만든 결과물은 예상 밖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독창성을 갖는다. 생명을 가진 모든 인간은 영속성 있는 자기 세계를 갖고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과 정체성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예언과 같은 선언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산업혁명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경제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필요하다는 생각을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리게 했다.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가져간 세월호 사건도 누가 얼마나 보상을 받는 게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유대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가 그저 명령에 잘 따른 한 인간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경제적인 가치가 모든 것에 우선하며 나의 이익이 아니라면 상관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에 익숙해지고 있다. 개인이 초래하는 악의 평범함을 현실로 목도하고 실질적으로 분노했던 정권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때 그녀의 철학은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녀에게 3이란 숫자는 특별한 의미다. 삼각뿔 바닥의 세 꼭짓점이 새로운 꼭짓점을 향하는 이야기 방식을 즐겼다. 세 번의 탈출은 어떤 꼭짓점을 향하고 있을까. 첫 번째 탈출은 과거로부터의 유산과, 태어난 곳에서의 탈출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탈출이었지만 불가피한 상황과 협상한 탈출이었다. 두 번째 탈출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함몰된 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망망대해 위에서 역사의 바람(진보)에 따라 떠밀린듯한 탈출이었다. 마지막 탈출은 그녀가 거울처럼 본받고 영향받았던 연인’하이데거'의 그림자에서 탈출이었다. 마지막 탈출은 어쩌면 스스로 굴레를 씌워 옴짝달싹 못했던 자신에 대한 용서였다. 그녀는 세 번의 탈출로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철학 대신 난간 없는 사유의 세계로 나아간다.

 

 

 

"세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유일한 진리나 이해를 위한 묘책 같은 건 없다. 영광스럽고 결코 끝나지 않는 난장판이 있을 뿐이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끝없는 난장판 말이다. "237

격동과 수난의 시대 속, 동시대의 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인간의 조건>과 <악의 평범함>을 이야기했던 한나 아렌트의 일대기를 그래픽 노블로 읽게 되어 설렜다. 그래픽 노블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총망라되어 있었다. 어려운 철학 얘기부터 끈적끈적한 증권가 지라시 같은 내용까지 예술로 승화하여 멋들어지게 읽을 수 있었다. 뿌연 담배연기처럼 뭉뚱그린 배경 속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모아지는 날카롭고 유연한 선들의 조합! 끝날 것 같지 않은 수난을 겪으면서도 자신과 끝없는 대화를 하며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그녀의 행적들이 그림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였다. 그녀는 평생 손에서 놓지 못했던 담배의 연기 속 환영처럼 인간이 끝없은 자유를 위한 난장판이 멈추지 않기를 희망했다. 삶은 철저한 사유 속에서 끊임없이 탄생하는 각자의 이야기다. 자기와의 대화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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