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냐의 유령 에프 그래픽 컬렉션
베라 브로스골 지음, 원지인 옮김 / F(에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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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스너 상 수상작

<뉴욕타임스> 추천도서

<혼북> 선정 최고의 그래픽 노블

 

칼데콧 아너상을 수상한 “날 좀 그냥 내버려 둬”를 쓴 베라 브로스골의 책 <아냐의 유령>이다. 아냐가 늙으면 할머니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큰 눈동자에 심통스러운 표정이 비슷하다. 표지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아냐의 머리카락과 그 속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누군가’였다. 머리카락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자라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내면의 강인함과 힘의 상징으로 여겼다. 자연스럽게 자라는 머리카락은 의식하지 않고 저절로 나오는 무의식적 생각을 뜻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곤두선 머리카락은 마력, 신들린 상태, 공포를 뜻하는데 표지 속 아냐의 머리카락은 표지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일렁이고 있다. 아냐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영상에서도 볼 수 있듯 아냐의 일상은 신통치 않다. (십 대들의 일상이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러시아에서 이민 와서 산지 오래지만 여전히 러시아에 살던 방법을 고수하는 뚱뚱한 엄마. 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눈엣가시 같은 남동생. 친구라고는 담배나 피우고 다니는 불량스러운 소반뿐이다. 그렇지만 아냐의 일상에서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못생기고 뚱뚱해서 남자 친구가 없는 바로 ‘나’였다.

 

학창시절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니키의 <도크 다이어리>에 등장하는 ‘짱족’들처럼 잘 사는 부모와 예쁜 얼굴은 기본, 추종자라 불리는 아이들까지 거느리고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대부분 아이들은 그 부류에 속하지 못한다. 대신 그들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며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 우울해하기 십상이다. 내가 가진 것은 보잘것없고 남이 가진 것은 위대해 보이는 것이 그때 그 시절 내가 겪었고 지금 아냐 또래의 아이들이 겪고 있는 최고의 고통일 것이다. 

 

 

<아냐의 유령>에서는 우연히 빠진 구덩이에서 만난 유령이 아냐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드러내고 실현시켜 준다. 아냐는 유령 덕분에 공부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얻게 되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남자아이와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욕망은 꿈꿀 때만 아름다운 것이라 했던가. 마음속 욕망은 겉으로 드러낼수록 조금씩 더 강해진다. 짧은 머리카락을 가진 꼬마의 모습에서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기른 유령의 변화는 욕망이 발톱을 드러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성장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욕망은

처음에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다가

어느덧 손님이 되고

곧 마음의 주인이 된다

- 톨스토이-

그러나 아냐는 유령의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않고 유령의 비밀을 혼자 찾아 나선다. 그리고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욕망을 뚫고 자신의 삶을 원래의 일상으로 돌려놓는다. 다시 유령이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아냐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다른 사람을 흉내 내고 멋있어 보이기 위한 행동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유령을 만났던 구덩이를 메우는 것은 유혹을 이겨내고 한 단계 성장한 아냐의 모습을 뜻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1984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 간 저자의 이력 탓인지 아냐의 욕망의 근원은 자신의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자로 살면서 어릴 때부터 FOB(Fresh Off the Boat)라 불리며 자신의 출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뿌리를 찾는 모습은 <날 좀 그냥 내버려 둬>에서는 핏줄을 뜻하는 빨간 털실로, <아냐의 유령>에서는 뼛조각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 뿌리가 늘 자신의 발목을 잡고 유령처럼 어른거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냐처럼 지금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며 진정한 나다움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 것을 깨닫고 그녀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책을 보며 러시아 대 문호 톨스토이가 계속 떠올랐다.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소설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던 그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도 평생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내린 결론은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려는 심리가 있지만 그 변화를 끌어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두운 욕망의 구덩이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 구멍 속에 사는 욕망을 잠재우고 새로운 길에 들어서는 아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이전의 아냐는 아닐 것이다. (이미 담배를 끊은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쇼반의 말처럼 평범해 보이지만 개개인들에게는 남과 다른 나만의 무엇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제 자신만의 매력에 눈 뜬 아냐.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아냐의 새 출발을 환영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친구들의 새 출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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