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들의 아찔한 수다 - 여성 작가들의 아주 은밀한 섹스 판타지
구경미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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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 여섯이 모여 섹스 판타지라는 테마로 쓴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다. 2011년 가을 남성 작가들이 내놓은 《남의 속도 모르면서》의 후속편이라 할 수도 있다. 당당하고 자신 있게 선보인 이 소설집은 어쩐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던지는 선전포고 같기도 하고, 여자의 심정은 이러하니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 번 해봐라 라는 당부를 담은 편지 같기도 하다.

 

김이설 <세트 플레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다 까발려도 되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화자는 사내라 하기에는 이 퍼센트 부족한 감이 있는 고등학생 남자 아이이다. 이 아이가 내뱉는 더없이 노골적인 단어들의 나열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의 욕지거리처럼 오히려 더 순진하게 다가온다. 김이설의 소설은 참 고단하다. 전작인 <환영>을 읽고 난 후 느꼈던 허탈함과 고단함이 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회 밑바닥 층에서 아등바등하며 하루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고단한 섹스. 그네들의 발버둥이 고단하다.

 

이평재 <크로이처 소나타>

알 수 없는 말을 툭툭 던지는 女子와 대화를 나누면서 男子는 스무고개를 하는 느낌을 받았다. <크로이처 소나타>는 바로 이 스무고개 같다. 차근차근 고개를 하나씩 넘어가다 그 끝에 가서야 실체를 드러내는 스무고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음률에 섹스라는 행위를 그대로 올려놓았다. 때로는 음률의 고저에 따라, 때로는 박자의 빠르기에 따라. 여기에 동물의 원초적인 사냥과정을 얹혀 놓는다. 男子와 女子의 섹스,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 손가락원숭이의 유충 사냥이 더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한유주 <제목 따위는 생각나지 않아>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글. 하지만 한 번쯤 읽으면 좋을 법한 글. 굳이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남의 얘기 듣듯 무심하게 읽고 싶은 글. 애틋함을 지나서 만나도 그만 안 만나도 그만인 무덤덤한 관계가 된, 그래서 의미가 없어진 사람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무심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느낀다.

 

김이은 <어쩔까나>

통통 튀는 문장과 재치 있는 입담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앞선 단편 세 편을 읽으면서 지친 독자를 토닥토닥 다독여 기운을 불어주는 역할을 하는 네 번째 작품. 이 책에 실린 작품 여섯 편 중 가장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탄탄한 스토리는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장편소설 한 편을 숨 가쁘게 읽고 난 뒤의 기분을 선사한다.

 

구경미 <팔월의 눈>

기계의 부품처럼 어느 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면서도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자. 여자 앞에는 천 년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기에 절망하지 않지만, 하루라도 더 빨리 빠져나오려 쉴 새 없이 노력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 가운데 뜬금없이 찾아든 하룻밤의 섹스. 여자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휴일 하루나 다름없이 그저 하룻밤 휴식에 지나지 않는다.

 

은미희 <통증>

가장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은 바로 육제의 대화 시간이었다. 감추려하고 속이려하고 아닌 척해도, 저도 모르게 끌려가게 되는 섹스. 이 노골적인 행위를 통해서 그녀는 그의 존재를 느끼고, 그를 온전히 가진다. 허나 행위가 끝나고 남는 것은 허상뿐. 그래서 더 간절하기만 하다.

 

짜임새 있는 단편 여섯은 따로 또 같이, 독자를 매혹시킨다. 분명 화자와 구성과 스토리가 제각각인데도 불구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다. 치열하게 섹스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라. 어두운 구석에서 음탕하고 흉물스럽게 웅크리고 있는 섹스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라. 그러면 우리의 판타지는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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