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사전 - 인생의 작은 숙련가를 위한
단춤 지음 / 유유히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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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을 받을 때마다 유독 어려웠던 질문이 있다. 
"어떤 기분이 드세요?", "지금 어떤 감정이 느껴지시나요?"
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술술 말이 나왔지만, 막상 감정을 묻는 순간 입이 굳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알아채는 감각이 무뎌져 있었고,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꾹 눌러 담는 게 습관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다 이유 모를 눈물이 터지거나, 당혹스러운 들뜬 마음을 떠안기도 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작은 쉼표 같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단춤 작가는 50가지의 감정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냈고, 나는 그 정의를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내 마음속 무언가를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짧은 만화와 에세이는 '나도 이런 적 있는데'하고 감정을 짐작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내 감정에 손을 뻗게 한다. 귀여운 그림과 솔직한 문장은 촘촘한 일상에 작은 틈이 되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휴식이 되어 주었다.

책을 읽는 내내 다정하고 부드러운 문장에 위로를 받았다. '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존중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태도에 감탄이 났다. 감정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감정에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장을 거울삼아 나를 비추고 내 이야기를 꺼내기 바빴다. '그러시군요, 저는 이렇습니다'가 반복되었다. 생각보다 나는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담백한 이야기가 용기와 응원이 되어 나의 기억과 감정을 일깨워주었다.
50가지의 단어에 단춤만의 정의를 써 내려갔듯, 이 책은 읽는 사람에게도 자신만의 언어로 감정을 표현해 보라고 건네는 책 같다. 말로 꺼내고, 나만의 이야기로 적어 가는 것. 그렇게 천천히 감정을 알아차리고 느끼는 것이, 삶을 더 깊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풍요로운 숙련가가 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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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윤혜정의 예술 3부작
윤혜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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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이나 전시관은 음악회보다는 접근하기 쉬운 편이지만, 여전히 나에겐 어렵고 낯선 공간이었다. 그림은 그나마 덜하지만, 특히 전시나 조형물 앞에 서면 '무엇을 느껴야 하지?'라는 생각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나에게 예술은 가까운 듯하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어려운 세계였다.

이 책은 저자의 '예술 3부작'의 최종 편으로, 예술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다루고 있다. 국내와 국외 다양한 예술가와 작품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통찰을 담았고, 역사를 함께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관심 있는 전시를 고르듯, 목차를 보고 마음 가는 대로 골라서 읽기가 가능하다. 나 역시 이리저리 골라 가며 읽었고,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보며 공간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작품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공간과 예술가, 작품을 알 수 있었고 저자의 생각과 통찰 덕에 다양한 관점으로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어렵고 정담이 있는 일이라 생각했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작품을 보고 느끼는 건 결국 나의 고유하고 사적인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작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있는 공간과 작품을 보게 된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감상의 중요한 일부라는 점도 새롭게 다가왔다. 남이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즐기는 방식을 새롭게 배웠다. 저자가 말한 대로 느리고 천천히 책을 읽고, 작품을 보니 이전이라면 휙 하고 넘겼던 것도 음미하게 되었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소비되는 콘텐츠에 익숙해진 요즘, 예술이 주는 느림과 깊이 있는 사유는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예술이 전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공간을 느끼고, 작품을 통해 생각하는 과정 전체가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해준다.

휴대전화를 내려 놓고, 작품을 음미하고 진정으로 즐기러 전시회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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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앤드)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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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 기차를 타고 가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멋진 풍경에 감탄하거나, 창 너머 누군가의 일상을 보며 잠시 그 삶을 상상해본다거나.(내가 대문자 N이라 그런 걸지도😅)

이 책은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기차를 타는 여성 ‘레이첼’이 창밖을 지켜보다가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시작되는 심리 스릴러다. 레이첼은 과거의 상처로 알코올 중독 상태에 빠져 있고, 거짓말을 일삼는 인물이다. 그녀는 술에 취한 채 전 남편의 집 주변을 맴돌다 기억을 잃고, 그날 한 여성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사라진 기억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는데…

책을 읽다보면 레이첼의 행동이 종종 답답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녀의 잘못이라기보단, 전 남편이 빡치게 하긴 했지만)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술에 더 깊이 빠져드는 모습은 안타깝다.그러다 얽매이는 것이 실종과 살인사건이라니. 혼란스럽다. 대체 뭐가 진실인걸까?

이 소설은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쉽게 왜곡되고, 진실과는 다를 수 있는지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레이첼, 메건, 애나—세 여성의 교차되는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몰입감을 더한다. 마지막 반전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삶을 훔쳐보고 상상하는 것이 쉬워진 요즘, 우리의 기억과 판단이 진짜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책의 두께에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고자극 도파민 독서 추천! 단점은 새벽까지 읽어서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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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
백사혜 지음 / 허블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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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먼 미래 지구에서 시작해 우주 행성까지 뻗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SF소설이다. 
지구는 거대한 재벌가들의 소유가 되어, 땅의 주인인 영주 계급이 탄생했다. 이들은 끝없는 욕망을 품고 우주 개척에 나선다. 우주를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다양한 행성으로 파견 하지만,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영주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율성과 독립의 움직임이 퍼지자, 영주는 전쟁을 시작한다.
 
소설은 총 여섯 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얇은 실로 연결된 것처럼 이어져 있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전체 흐름 속에 잠기게 된다. 독자는 마치 행성을 여행하는 어린 왕자처럼, 각기 다른 행성의 세계를 지켜보게 된다. 
과학기술은 영주의 욕망에 의해 눈부시게 발전한다. 하지만 도덕성과 인간성은 결여되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불사의 몸을 위해 인간을 희생하거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위해 인간을 배양한다. 이런 환상적이고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는 오히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현실 세계와 맞닿아 있는 지점을 발견하게 한다. 잔혹함과 탐욕만 남은 세계에서 독자는 점점 사라진 것들—윤리, 인간성, 연대,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기게 된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무엇이 진정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를 되묻게 된다.

이 책의 표제작 <그들이 보지 못할 밤은 아름다워>는 얼굴 없는 용과 인어 그리고 아름다운 존재가 등장하는데, 하얀 눈밭이 배경이라 그런지 더욱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화자인 나는 우주 전쟁으로 인해 물속에 오랫동안 있을 수 있도록 몸을 개조했다. 그러다 결국 잡히고 한 행성에서 아기를 키우는 벌을 받게 된다. 영주의 반려가 되기 위해 아름다움으로 배양된 아기는 매뉴얼을 어기게 되면 금방 죽어버리고 그럴 때마다 아기는 새롭게 배양된다. 나는 충격을 받고 아기를 매뉴얼대로 키우지만, 사랑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다 결국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화자인 ‘나’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감정과 생각이 점점 변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느껴진다. 특히 ‘나’를 엄마라고 부르던 아기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보는 장면에서는 문득 멈춰 서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마주한 한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나 자신이라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되묻게 되었다.

작품을 통해 권력이 만들어낸 인간의 탐욕이 결국 얼마나 참혹한 결말을 불러오는지를 목격하면서,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깜깜한 밤하늘 아래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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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없는 마음 - 양장
김지우 지음 / 푸른숲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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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유럽과 호주 여행기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짐이 좀 많고 시선이 낮은 것이 특징인 이 여행기는 우리가 몰랐던 곳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한다.
책을 펼치기 전, 휠체어를 탄 저자라는 소개를 보고 ‘장애로 인한 해프닝’이나 ‘장애를 극복한 감동 서사’를 예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 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실패에 부딪히며, 이동에 제약이 있을 거라는 편견을 부수고 혼자 혹은 같이 바퀴를 굴리며 휙휙 앞으로 나아간다. 바퀴가 없는 곳에서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계단을 뛰어내리는 용감하고 거침없는 저자의 좌충우돌 여행기를 보다 보면 누구나 응원을 보내고 싶어질 것이다. 여행하고 싶은 건 덤.

생각해보면, 일상 속에서 장애인을 마주친 기억이 거의 없다.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서조차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기 어려운 건 왜일까.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 짓고 싶어 하는 것은 비장애인이 아닐까. 그들이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으로 구분 짓고 넘어오지 말라고 선을 그어 버린다. 설령 혼자 거리를 지나가고, 장을 보고, 생활 공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도 그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감탄했고, 감동했고, 그리고 분노했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왜 한국은 하지 않는 걸까? 라는 생각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다.

특히 저자가 ‘장애를 고난과 극복의 이야기로 소비되지 않게 하려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왜 장애인의 삶을 늘 극복서사로만 바라보는지 곱씹게 되었다. 왜 그들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해피엔딩으로 가기 전 잠깐의 고난으로 보고 있는 것인지. 이런 편견 속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실패자가 되어 숨거나 위인이 될수 밖에 없다. 이런 시선으로 저자에게 어떤 서사가 요구되고 있지 않을까, 비장애인의 입맛대로 한 사람의 삶을 납작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행위를 매 순간 경험하고 있지 않을까?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죄책감 없이 손을 뻗고, 뻗어온 손을 기꺼이 맞잡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유럽과 호주에서 의심하지 않는 마음을 배웠듯, 나도 기꺼이 손을 뻗기도 하고 맞잡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동정하는 마음이 아니라 언젠가 받을 친절을 미리 저금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도움 요청 예술'이 매끄럽게 공연되려면 미리 연습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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