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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의 재앙속에서 살다
사사키 다카시 지음, 형진의 옮김 / 돌베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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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벌어진 지 벌써 2년. 쓰나미가 몰아치고 폐허가 된 자리에 설상가상으로 방사능까지 몰아쳤다. 도호쿠 지역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집을 잃고 떠돌게 되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한 노인이 있다. 그는 이 책의 저자인 사사키 다카시이다. 그의 집은 미나미소마. 사고가 벌어진 원전과 불과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 곳에서 치매에 걸린 자신의 부인과 아들 가족들이 함께 머무르고 있다. 

 

사사키 다카시는 원전 사고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 블로그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불만을 토로한다. 무조건 대피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본 정부를 향해 쓴소리를 내기도 하며 엉망진창으로 진행되는 행정업무를 겪고 불처럼 화를 낸다. 

 

사사키 다카시는 아들 가족을 일본 내륙으로 보내고 자신과 아내 둘이서 집을 지킨다. 이웃이 모두 떠난 미나미소마에서, 그 둘은 외로이 집을 지켰다. 사사키 다카시는 비극에 대항하는 영웅이 되려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 하에 그는 머무르는 것을 택했을 뿐이다. 그는 미나미소마의 방사능 수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고, 오히려 단체로 피난을 가 머무르는 곳의 방사능 수치가 더 높다고 말했다.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그가 머무르는 동안 미나미소마에 살던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자신이 오랫동안 살던 삶의 터전에서 쉽게 정을 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지만, 마을의 부흥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청년은 수익금을 모두 시청에 기부하는가 하면 지붕 수리를 도맡아 하던 사람은 이웃들의 집을 고쳐주며 돈을 받지 않는다. 사사키 다카시는 문화강좌를 열려고 하며 미나미소마시의 의사들은 직접 집에 방문해 이웃들의 건강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원전 사건 이후로 녹차가 들어간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다. 대부분의 녹차 음식에 사용되는 녹차분말은 일본산이고, 원전 사건 이후로 일본산 녹차분말의 가겨은 더 낮아졌을 것이다.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물 건너에서 피해자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동정을 표했다. 그들이 살던 터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그들의 마을인 미나미소마 또한 단 한번도 죽은 적이 없었다. 

 

사사키 다카시는 자연재해에 대항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 정부의 안일하고 무책임한 대응에 분노하며 자신이 미나미소마에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블로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의 생각에 대해 말한다. 그가 보여주는 강인한 태도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고 최면을 걸며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집단 피난소에서 사생활이 없는 삶과 열악한 환경, 불확실한 내일 속에서 사느니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을 유지하며 사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인재에서 비롯된 천재지변과도 같은 위기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오롯이 살아가는 노인이 있다. 피폭의 위험 속에서 어제와 같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사사키 다카시. 그는 영웅이나 시위자가 아니라 평온 속에서 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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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우리를 삼키기 전에! - 청소년을 위한 ‘전쟁과 평화’ 이야기 생각하는 돌 2
게르트 슈나이더 지음, 이수영 옮김 / 돌베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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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진, 선, 미 는 힘, 승리, 빠른종전이다.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새 중에서

 

 

 

괴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실체를 가진 어떤 생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괴물은 실체가 없는 '전쟁'이 아닐까. 우리는 TV를 통해 전쟁의 접하고 또 외면한다. 하지만 전쟁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휴전국임을 항상 기억해야 하지만,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우리들에겐 힘든 일이다.

 

돌베게 청소년도서 시리즈 중 두번째 책인 '괴물이 우리를 삼키기 전에!'. 이 책은 청소년에게 전쟁의 참상과 전쟁이 지키려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콜오브듀티, 배틀필드같은 게임을 통해 전쟁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그저 게임으로만 접했던, 재미있고 적군을 더 많이 죽여야만 하는 전쟁을 직면하게 해주는 책이다. 

 

전쟁에 관련한 책이라면 으레 그렇듯 역사적인 사건과 시간 흐름에 따라 전쟁의 양상과 유형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여기에 있다. 시간 흐름에 따라 전쟁을 설명하기 보다는 각 장에 매달린 제목에 알맞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전쟁 자체를 보기 보다는 전쟁이 인간의 삶에 미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십자군 전쟁이나 2차 세계대전을 설명한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점이 한 개인에 맞춰져있기 때문에 전쟁의 잔혹한 현실과 그 참극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아이는 교과서의 굴레에서 벗어나 부담감을 버리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선 그 내용이 잔인해질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전쟁 게임이나 TV의 뉴스보도가 그러하듯 이 책도 잔인하고 참담한 전쟁의 피해를 나열한다. 하지만 '책'이라는 매체의 속성상 이러한 잔인함은 자극적인 흥미성의 컨덴츠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교훈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책을 권해야 할 이유이자 우리 또한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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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지오 소스테누토 -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문학수 지음 / 돌베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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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나는 숨어서 음악을 들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음악 전문 기자가 쓴 클래식 입문서이다. 격동의 80년대를 음악 감상실 한구석에 숨어 현실과 분리된 채 보냈던 저자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안타까운 자기 부정의 세월’이라 말한다. 현실의 문제로 인해 자신이 꿈꾸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삶을 살았고, 아주 가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것이 사치였던 때, 그리고 지금은 클래식이 평범하지 않은 남다른 취향이 된 때이다. 클래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문화자본으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런 클래식 입문서의 출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보통의 클래식 입문서가 그러하듯 이 책도 수많은 음악가를 다루고 있다. 슈베르트, 모차르트, 바흐, 하이든…….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각 음악가들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음악은 개인과 당대를 품으면서 하나의 맥락을 형성한다. 우리는 그 맥락을 접하면서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마음 아파하며, 어떤 경우에는 미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동서고금의 작곡가들뿐 아니라 현대의 지휘자와 연주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음악은 그렇게 살아서 꿈틀거린다. 때로는 수백 년 혹은 수십 년 전에 이미 쓰여진 음악을 우리가 듣는다 치더라도, 그 속에는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느껴왔을 보편적인 희로애락, 당대와의 갈등이나 타협, 때로는 권력을 향한 욕망 같은 것들이 여전히 살아서 흘러가는 것이다.’ p. 14

천재라 불리던 모차르트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휴식이 없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혹독하게 훈련받은 모차르트가 겪었던 빡빡한 연주여행부터 첫사랑과의 결혼까지, 저자는 음악가들을 밀착 취재한 것 마냥 이야기를 엮어낸다. 이러한 구성은 화려한 무대의 뒤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단순히 알고 있던 사실 이면에 숨어있는 현실적인 이유를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개인적 욕망으로 인한 선택, 즉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 한 선택이 교과서에는 음악하기에 더 좋은 환경을 바랐던 것이라고 서술된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저자는 음악가가 살던 당시의 시대상과 관련지어 화려한 부르주아의 삶 이면에 숨어있는 빈곤층의 비극적인 삶도 다루고 있다. 하이든이 런던에서 부르주아지들에게 연주회를 하는 그 순간, 런던의 또 다른 곳에서는 굴뚝청소를 하던 작은 아이가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되는 일이 태반이었다. 저자는 전혀 관련지을 수 없을 것 같은 하이든과 런던 빈곤층의 삶을 절묘하게 연결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이런 점에서 보편적인 클래식 입문서와의 차이가 드러난다.

또한 이 책은 입문서로서의 기능에도 충실하다. 음악가 당 10페이지 정도로 적은 분량을 다루지만, 그 안에 많은 정보를 눌러 담았다. 잘 쌓은 테트리스처럼 음악가를 소개하고, 각 음악가의 명반을 소개하며 연주자의 특징도 꼼꼼히 잡아준다. 어떤 곡을 먼저 들어야 할지, 어떤 연주자의 연주를 들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저자가 클래식에 가지는 애정이 책 전반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점이 입문서로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음악가에 대해 단순한 사실만이 아니라 각 음악가의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함께 실었다. 이를 통해 나와 저자의 생각만이 아니라 그 음악가의 전문가가 갖고 있는 생각도 함께 접할 수 있다. 저자가 클래식에 취미를 갖고, 애정을 가지며 열정을 쏟지 않았다면 담을 수 없는 내용일 것이다.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음악가들의 삶은 사실 생각보다 화려지만은 않았다. 저명한 음악가 하이든은 30년 동안이나 돈 많은 가문의 ‘하인’으로 살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교과서나, 다른 클래식 입문서에는 없는 이야기이다. 오직 ‘아다지오 소스테누토’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 불이 꺼지지 않는 무대를 위한, 무대 뒤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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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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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지금까지 세상에 선보인 책들 만큼이나 긴 제목을 달고 그 ‘하루키’가 돌아왔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문장을 필두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공사에 근무하는 서른여섯의 남성이다. 쓰쿠루는 고등학생 시절 어울리던 네명의 친구와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일방적인 절교를 당했고, 그 이후로 쓰쿠루는 죽음에 매우 가까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쓰쿠루는 스스로를 별 가치 없는, 별 볼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쓰쿠루는 이런 호칭이 단지 이름에 색깔이 없어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쓰쿠루와 함께 다녔던 다른 네명의 친구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색을 가진 채 살고 있었다. 다만 쓰쿠루 자신은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찾을 수 없었다. 쓰쿠루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남달리 잘하는 것도 없었고 특출나게 잘생긴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나라는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건, 타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나로서 실재하기 위해선 다른 이의 평가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또렷한 색채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쓰쿠루는 하얀 바탕의 역할을 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조화롭게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쓰쿠루가 있었기 덕분이었다. 쓰쿠루는 옛 친구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참된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이리라.



지금까지 읽어온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무언가 결여된 모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그 결여를 채우지 못한 채 그저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다자키 쓰쿠루는 달랐다. 쓰쿠루는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과거를 순례했고, 그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과 마주했고,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던 사나이 쓰쿠루. 그는 서른여섯이 되어서야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책이 하루키의 전작들과 다른 점은 그 결말에 있다. 하루키의 이야기는 허무하고 결말이 너무나 모호하고 염세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나 역시도 그런 이야기를 예상하고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하루키 특유의 개성은 유지한 채, 염세와 허무를 덜어낸 느낌이었다. 음악과 섹스는 여전하지만 다자키 쓰쿠루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이야기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 

 

그대여, 하루키가 말하는 사랑을 알고싶은가? 그렇다면 다자키 쓰쿠루와 순례를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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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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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시간 만큼 떨어져 있는 너와 나. 내가 한 말이 네게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7분 44초. 지구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배명훈의 신작, '청혼'.




우주 태생인 나는 우주 함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연인은 지구 태생의 지구에서 
거주하는 사람으로, 나는 170시간을 달려 40시간 동안 너를 만나고 다시 180시간을 거슬러 함대에 
복귀한다. '청혼'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이다.






요즘 누가 편지를 부치나. 휴대폰만 집으면 단 몇 초 만에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고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가장 빠르게 대화를 해도 17분이 걸린다. 휴대폰만 있으면 단 몇 초 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17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래서 '청혼'의 내가 170시간을 달려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에는 단지 사랑한다는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다. 너를 보러 오는 170시간 
동안 지나쳐 온 지긋지긋한 우주공간만큼 널 사랑한다는 것이다. 

메세지를 보낸 지 10분만에 전송되는 답장과, 보낸 지 열흘이 지난 후에 받아보는 편지가 주는 
반가움이 다른 이유는 이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들을 이들은 몇 번이나 곱씹어 
말한다. 떨어져 있는 거리 만큼의 신중함으로 쌓인 관계. 너무 빠른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중함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빠른 세상 속에서, 나는 아직도 편지를 쓴다. 펜을 들어 글씨를 쓰는 시간과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답장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의 설렘은 아무리 빠른 
메신저라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청혼'의 주인공이 170시간이 걸리는 청혼을 한 이유는, 170시간 만큼의 설렘과 170시간 만큼의 
신중함을 담은 청혼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주를 묘사한 일러스트이다. 마치 책을 통해 우주로 날아간 
듯 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몽환적인 일러스트는 책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어울려 환상적인 시너지를 
낸다. 본문 사이사이 들어간 일러스트 덕분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만난 지도 참 오래 되었다. 띠지와 덧싸개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작에서 꾸준히 만났던 배명훈의 위트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전작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보다 하드SF의 느낌이 듦과 동시에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아련함과 
먹먹함도 느껴진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내게 다가온 것들은, 256페이지 만큼의 무게가 
담겨있었다. 


나의 연인에게 이 책을 건네며 청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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