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70시간 만큼 떨어져 있는 너와 나. 내가 한 말이 네게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7분 44초. 지구에 
있는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배명훈의 신작, '청혼'.




우주 태생인 나는 우주 함대에서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연인은 지구 태생의 지구에서 
거주하는 사람으로, 나는 170시간을 달려 40시간 동안 너를 만나고 다시 180시간을 거슬러 함대에 
복귀한다. '청혼'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내가 너에게 쓰는 편지이다.






요즘 누가 편지를 부치나. 휴대폰만 집으면 단 몇 초 만에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할 수 있고 불과 
1초도 지나지 않아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가장 빠르게 대화를 해도 17분이 걸린다. 휴대폰만 있으면 단 몇 초 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에서 사는 우리에게 17분은 너무나 긴 시간이다. 그래서 '청혼'의 내가 170시간을 달려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에는 단지 사랑한다는 의미만 담긴 것이 아니다. 너를 보러 오는 170시간 
동안 지나쳐 온 지긋지긋한 우주공간만큼 널 사랑한다는 것이다. 

메세지를 보낸 지 10분만에 전송되는 답장과, 보낸 지 열흘이 지난 후에 받아보는 편지가 주는 
반가움이 다른 이유는 이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것들을 이들은 몇 번이나 곱씹어 
말한다. 떨어져 있는 거리 만큼의 신중함으로 쌓인 관계. 너무 빠른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신중함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빠른 세상 속에서, 나는 아직도 편지를 쓴다. 펜을 들어 글씨를 쓰는 시간과 편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답장이 오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의 설렘은 아무리 빠른 
메신저라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 


'청혼'의 주인공이 170시간이 걸리는 청혼을 한 이유는, 170시간 만큼의 설렘과 170시간 만큼의 
신중함을 담은 청혼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책을 펼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우주를 묘사한 일러스트이다. 마치 책을 통해 우주로 날아간 
듯 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몽환적인 일러스트는 책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어울려 환상적인 시너지를 
낸다. 본문 사이사이 들어간 일러스트 덕분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만난 지도 참 오래 되었다. 띠지와 덧싸개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작에서 꾸준히 만났던 배명훈의 위트가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전작과는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다. 
보다 하드SF의 느낌이 듦과 동시에 신카이 마코토의 '별의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아련함과 
먹먹함도 느껴진다.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내게 다가온 것들은, 256페이지 만큼의 무게가 
담겨있었다. 


나의 연인에게 이 책을 건네며 청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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