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백의 길
메도루마 슌 지음, 조정민 옮김 / 모요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상흔의 편린





여든여섯 살의 노구를 이끌고 쉰 살 아들 가즈아키 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내린다.


전쟁에서 입은 오랜 부상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오른쪽 무릎이 불편하다.

10월의 오키나와 오후 햇살은 강렬하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기분을 좋게 만든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열여덟 살이었고, 오키나와 북부 마을에서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방위대로 배치돼 중부 전선에서 미군과 정면으로 대치하는

우군 부대와 행동을 같이한다.


전쟁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야습을 시도하는 것 같다.


쉴 새 없이 조명탄이 터지고 포격과 기관총, 소총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너무 피곤하다. 바위에 머리를 기대어 눈을 감는다.

가냘픈 여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자극한다.


죽여 줘....


조명탄 불빛 아래 사오 미터 쯤 떨어진 풀 숲에 드러누워 있는

젊은 여자의 배에서 내장이 흘러나온다.


배뿐만 아니라 오른쪽 정강이도 부서져 살갗과

힘줄만 겨우 이어져 있다.


발목 근처에 상당한 양의 피가 고여 있다.

살지 못할 게 분명하다.


3미터 쯤 떨어진 풀 숲에 사내 아기가 누워있다.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움켜쥔 칼에 몸을 얹어 체중을 실었다.


유난히 밝은 조명탄 빛이 아기의 둥근 눈동자에 반사되자

뒤로 나자빠지고, 시선을 돌린 채 칼을 단숨에 뽑는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쟁 중의 일은 떠올리지 않으려 한다.


칠십 대 중반이 돼서부터 아기 얼굴이 꿈에 보이기 시작한다.


독선적 해석으로 아기를 죽여 버린 건 아닌지,

여자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를 떠날 걸 그랬다.


사람의 목숨도 죽음도 지금보다 훨씬 가벼웠다.


젊은 여자와 아기가 반듯하게 쓰러져 있던 그곳.

어떻게든 그자리를 찾아 꽃을 놓고 향을 피우고 싶다.



젊은 여자와 아기의 모습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주위는 밤의 어둠에 가려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혼백의 탑은 6월 23일 오키나와 전투 위령일에

가족의 전사 장소를 알지 못하는 유족들이 찾아와

손을 모으는 곳이다.


흰 국화꽃 다발을 놓고 향에 불을 피우는 동안,

가즈아키 는 술과 음식을 올린다.


오스프리 가 날아다니고, 거무스름한 녹색 미군 대형 트럭이 추월해간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나쁜 세상이 되었다. 더 나빠질 것이다.






오키나와 북부 항구에서 예정돼 있던 선적 작업이 모두 끝난다.


긴조 가 낚시로 잡아온 생선 미준 으로 잔교에서 노동자들의

술자리가 마련되면서, 전쟁 이야기가 펼쳐진다.


미야기 는 중국에 간 병사들이 물을 못 마셔서 많이 죽었다고 말한다.


먹을 것도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우물이나 샘물에 독을 부렸을까 봐

마시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갈증에 몸을 못 가누니 결국 쓰러진다.


쓰러진 동료의 입을 벌리고 허옇게 마른 혀를 끄집어내서

자기 침을 손가락 끝에 묻혀 문질러주기도 한다.


혀에 침을 문질러도 일어나지 못하면,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힘들다 보니 도와줄 수 없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갈증으로 인한 고통은 차원이 다르다.


목이 마르니 단 한 방울이라도 간절한데,

물에 독이 들었다 생각하면 누구나 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아무것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없다.

닥치는 대로 죄다 죽여 버린다.


야스요시 는 폭탄이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폭발로 의식 없는 중학생을 끌어내서 바위 위에 알몸으로 뉘여,


새벽에 기온이 내려가서 생긴 수분을 핥아먹고 겨우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데....





"혼백의 길"은 제2차 세계대전과 오키나와 전투를 소재로 한

혼백의 길, 이슬, 신神 뱀장어, 버들붕어, 척후 등 다섯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전쟁터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저마다 투쟁한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고통에 몸부리치는 여성의 죽여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노년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황혼의 노인,


전쟁 중 물을 먹지 못해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다, 시체에서 나온 수분을 핥아 먹는 군인,

전쟁에서 오키나와 주민 아버지를 죽인 본토 군인과의 풀리지 않는 앙금,


미군 기지 건설 현장과 오버랩 되는 전쟁에서 벌어진 오키나와 가족의 비극,

전쟁터에서 일어난 불신과 의심의 아픈 기억 등의 이야기는


오키나와인들이 전쟁에서 경험한 슬픈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아픔을 표현한다.



현재 세계 정세가 매우 불안하다.


러시아 와 미국의 대리전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펼쳐지고 있고,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으로, 동북아 전쟁 위험성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기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전쟁은 비인간적이다.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써야 하는 아이러니 한 상황에서,

비참하고, 괴롭고, 억울하고 불합리한 일이 비일비재 하다.


비극적인 아픈 체험을 증언하고 재현해야 하는 것은

과거를 결코 잊지 않고,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일 것이다.



인간의 존엄한 가치에 대한 존중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시기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며,

전쟁이 남긴 깊은 상흔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게 한다.



"혼백의 길"은 전쟁의 아픈 상처와 괴로움의 이야기는

전쟁의 아픈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됨을 생각하게 한다.


모요사 와 컬처블룸 서평단에서 "혼백의 길"을 증정해주셨다.

감사드린다.


#혼백의길 #모요사 #서평 #메도루마슌 #컬처블룸 #컬처블룸서평단

#오키나와 #제2차세계대전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