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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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고와 퇴직으로 인해 '나'의 가족은 서로 떨어져 살게 된다. 아버지는 보란듯이 장원이라는 곳으로 내려가 버리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 '준'을 데리고 살 집으로 어느 오래된 2층 주택의 2층을 구하게 된다. 2층 주택엔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지만, 1층에서는 어떤 인기척이 느껴진다. 소설의 초반부는 이 인기척을 추적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이 추적은 누군가를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호기심의 발현과 그 해결을 담고 있다. 그 누군가가 백발 할머니와 두 아이임을 알았을 때 '나'의 가족 그 누구도 그들을 몰아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쫓겨나지 않도록 비밀을 지켜주고, 챙겨주는 관계로 변한다. 변해 버린 생활 속 덤덤한 척해도 혼란스러웠을 '나'의 가족들에게 1층 가족들은 지켜야 할 대상이지만 오히려 위로를 건네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오래된 이곳은 누군가가 살던 자리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무너진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는 다시 시작한다. (157)


2층 주택은 더이상 귀신을 걱정해도 되는 곳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듬고 걱정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고,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안전한 관계가 유지되는 공간이다. 비밀스럽고, 누군가의 개입이 없다면 서로가 서로를 편안히 여기는 공간이다. 2층 주택에서 그들은 실패를 딛고 다시 시작할 꿈을 꾸게 된다. 꿩과 산삼 밭을 만나는 기이한 경험도 그들만의 비밀로 남겨진다.


먼저 경계를 넘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 그리고 나와 함께 경계를 넘으려고 기다린 엄마, 나보다 먼저 용기를 낸 동생. 평생을 살 거라 여겼던 집에서 호쾌하게 떠난 서백자 할머니. (155)


 2층 주택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의 가족은 좀더 성장한다. '준'은 장원으로 내려갈 결심을 하게 되고, 엄마와 '나'도 더 단단해진다. 이 모든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세계인 2층 주택, 그곳은 여러 사람들의 좌절과 희망이 중첩된 곳이 된다. 모두에게 2층 주택과 같은 시공간이 하나쯤은 존재하길, 그럼으로써 위로받고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있어 주길 작가는 바라는 듯하다. 시공간의 환대가 주는 따뜻함을 간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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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클래식 그래픽 노블
조지 오웰 원작, 피도 네스티 지음, 강동혁 옮김, 염승숙 해설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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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는 텔레스크린이라는 감시장치, 언어의 사용을 통제하고 역사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정치권력 등으로 형상화된다. 주인공 윈스턴은 역사를 조작하는 진리부 소속 당원이지만 체제에 저항하는 인물이다. 그 저항은 텔레스크린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고, 흩어져 가는 기억을 붙잡는 것 등 아주 사소하다면 사소한 것이다. 모든 생각이 통제되는 이곳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일종의 반역과 같다. 하지만 윈스턴은 어느 골동품에서 산 일기장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다. 누가 감시하는지를 알아채기 위한 먼지 한 톨을 일기장에 올려둔 채로.


언어의 중요성은 책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제시된다. 사임의 "새언어의 목표는 생각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라네. 우리는 결국 사상범죄를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게 만들 거야. 사상범죄를 표현할 단어가 사라질 테니 말이지.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단어로 표현되겠지. 혁명이 완수되는 건 언어가 완벽해질 때야."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언어는 권력에 의해 통제되고, 언어가 사라지며 생각을 표현할 길도 사라진다. 윈스턴은 이에 처절히 저항하지만 결국 윈스턴의 모든 행위는 당원들에 의해 7년 동안 감시되고 있었으며 결국 모든 정신이 개조된 채로 죽음을 맞는다.


윈스턴의 죽음 이후 부록으로 제시되는 새언어의 원리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인간의 생각은 언어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 생각을 나타낼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상도, 감정도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 윈스턴이 적발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일기를 쓰게끔 했던 추동력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붙잡는 행위로서의 언어가 갖는 소중함을 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대권력에 저항하는 것, 일기 쓰기라는 어쩌면 아주 작은, 그러나 결코 거대권력이 언어를 바꾸기 전에는 막을 수 없는 것. 개성과 자유를 지키는 힘은 여기에 있다.


감시, 획일화, 개성의 몰살, 언어 사용 등 청소년에게 문제의식을 제기할 주제가 많은 책이지만 그만큼 무겁고 어렵기에 청소년들이 선뜻 읽기 꺼려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래픽노블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던 빅브라더와 같은 감시체제, 그 감시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회색빛 삶, 권력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인물의 모습과 행동 등이 적절한 삽화로 제시되며 위압감이나 공포를 나타내는 만화적 구성도 적절히 취하였다. 윈스턴이 책을 펼쳐볼 때 과감히 모든 그림을 생략하고 일반적인 도서의 구성을 취한 것 또한 그래픽노블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장점일 것이다. 이 책으로 권력과 감시, 언어를 통한 자유에 대해 청소년들이 좀더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길 바란다. 물론 책을 읽기 힘들었던 어른들에게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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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부 종이접기 클럽 (반양장) - 천 개의 종이학과 불타는 교실 창비청소년문학 118
이종산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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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비 오는 날, 도서부이자 종이접기 클럽의 부원인 세연, 모모, 소라가 학교의 귀신을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주인공인 세연이 종이학을 접어 달라는 귀신을 직접 만나게 되며 시작된다. 이 첫 챕터인 '비 오는 날의 괴담과 판다와 종이학'은 창비어린이 통권 제69호에 실린 단편을 다듬은 것이기도 하다. 단편을 먼저 읽어 보았을 때에는 단순한 학교 괴담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밤에 홀로 학교에 있어 보면, 왜 학교 괴담이 심심찮게 등장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귀신, 괴담, 그런 소재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 소설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는 학교 괴담과는 사뭇 달랐다.

세 명의 등장인물은 책도 읽고, 학교의 귀신에 대해 관심이 많은 졸업생 선배도 만나고, 왠지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선생님에게도 질문을 하고, 블로그에 종이학 귀신을 적어 둔 할머니 졸업생과도 만나며 귀신의 정체를 파헤쳐 나간다. 언뜻 들으면 무슨 그런 일에 관심을 두느냐, 싶겠지만 세 명의 소녀들은 진지하게 사건에 임한다.

"제가 이상한 일들을 좇는 게 아니라, 무언가가 저를 자꾸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이상한 일들이 저를 따라올 것 같아요. 부끄럽지만 저는 그래서 비밀을 찾고 있어요. 그러면 이상한 일들도 멈출 것 같아서요."

92~93쪽

소설은 사건을 좇는 동시에 도서부의 일상, 그리고 종이접기 클럽의 일상을 함께 다룬다. 서로 수다를 떨거나 학교 생활을 해나가는 모습은 여느 중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럴 때쯤, 잊을 때쯤 사건이 지속적으로 부원들을 건드린다. 각자가 사건을 대하는 마음은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세 명의 소녀들은 언제나 연대한다.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외면하지도 않는다. 소라가 사라졌을 때, 세연과 모모는 무서움을 무릅쓰고 함께 소라를 찾아 나선다. 홀로 서는 힘도, 연대하는 힘도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 도서부 종이접기 클럽의 규칙이 있다.

절대 대신 접어 주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스스로 끝까지 해내야 한다. 그 대신 모모나 소라는 내가 종이접기를 하다가 막혀서 절망할 때마다 옆에서 속도를 늦춰 천천히 종이를 접는다. 두 사람이 접는 모습을 집중해서 따라 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분도 결국은 접을 수 있다. 모모와 소라는 내가 해낼 때까지 몇 번이고 옆에서 종이를 다시 접어 준다.

106~107쪽

귀신이라는 소재를 차용했을 때부터 일반적인 내용은 아니리라 생각했으나, 세 명의 소녀들이 서고의 미스테리한 공간을 통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1937년, 모교의 재학생들이다. 시간을 거슬러 가며 작가가 보여주고 싶었던 역사의식이 함께 드러난다. 일제의 오리가미 클럽과, 종이접기가 애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소설을 착안했다는 작가의 말에서 드디어 이 책의 모든 구성과 의도가 이해되었다. 그러나 작가는 일제 강점기의 절망과 비극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치욕스러울지라도 살아서 이를 극복하는 것, 연대하여 맞서는 것, 그럼으로써 결국 미래의 어느 도래할 희망을 기꺼이 기다리는 것. 그런 것으로부터 비극 속 희망이 새어나온다.

'불타는 교실'은 이야기를 쓰는 초반부터 떠올린 이미지였다. 고통과 핍박, 죽음, 희생이 내가 이 이야기에서 발견할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를 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다. 살아 있던 얼굴들. 생생하게 살아 있었고, 불의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고, 웃고 울었던, 그리고 살아남았던 사람들.

202쪽

1937년의 풍영중 학생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풍영중 세연, 모모, 소라에게 종이학을 접어 날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여름날 저녁, 도서부 학생들과 함께 꼭 한번 읽어 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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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한 문장부터 - 10대를 위한 글쓰기 기본기 창비만화도서관 9
이강룡 지음, 국민지 그림 / 창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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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국어 교과서를 처음 받아들고 수업 준비를 할 때만 해도, '가르치는 내용이 쉽군.'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아이들은 의외로 쓰는 것을 어려워하더라는 것이다. 내용을 구성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공책 검사를 하거나 수행평가로 아이들 글을 받아 볼 때마다 맞춤법, 띄어쓰기를 체크하느라 바쁘기도 일상이고. 그럴 때마다 어디서부터 지도해야 할까 마음이 막막했다. 아이들을 붙잡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알려 주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도 하고. 알려주면 '아 그렇구나!' 한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아이들이 즐거워할 만한 구성을 취하고 있어 좋았다. 일상 속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 자주 틀리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들을 설명해 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만화를 적극 활용한 점이 좋았다. 긴 만화도 읽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생각해서인지 한 면에 4컷씩으로 간단하게 구성되어 있는 점도 좋았다. '틀린 표현을 더 찾아보자' 코너를 마련하여 배운 내용을 간단히 복습해 볼 수 있는 구성도 세심하다.

여기까지는 예상할 수 있는 구성이었다. 이 책 정말 괜찮다, 학교 도서관에 두고 싶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책의 2부와 3부였다. 2부를 읽으며 수행평가 때 정말 'ㄷㄷ' 'ㅋㅋ' 같은 것을 써내거나 비속어를 수시로 사용하는 아이들에게 왜 이런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지, 어떻게 바꿔 사용하면 좋은지 등을 친절하게 알려 주고 있어 아이들의 실제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심결에 쓰고 있는 차별적인 표현이나 고쳐야 하는 옛 가치관이 담긴 표현들도 자연스럽게 소개해 주면서 아이들의 사고를 바꾸어 주도록 구성한 점 또한 책 구성에 있어 신경을 많이 쓴 부분이라 느꼈다.

3부에서는 구체적으로 문장을 어떻게 쓸지 알려주고 있다. '잘 써!'라고 말해 왔던 나를 되돌아보게 되는 부분이었다. 좀더 나은 방향으로 문장을 수정하는 방법, 비유 등의 표현을 실제로 활용하여 문장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 등을 친절히 알려 주고 있었다. 글을 끝맺는 마지막 문장의 중요성까지 짚어 가며, 완성도 높은 글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점이 인상깊었다.

글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아이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선물같은 책이다. 우리 반 교실에 슬쩍 가져다 두어야겠다. 글을 좀더 잘 쓸 수 있도록,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좀더 잘 전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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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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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는 백온유 작가의 책이다. <유원>에서의 유원이 죽은 언니의 무게를 안고 살아야 했다면, <페퍼민트>에서의 시안은 죽지 않은 엄마의 무게를 견디며 산다. 시안의 엄마는 '프록시모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위중한 상태를 겪고 난 뒤 식물인간이 되었다. 그 이후로 시안의 삶은 달라졌다. 여느 아이들처럼 어느 대학을 갈까, 수능이 언제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리고, 입시를 위해 학원에 간다. 시안은 학교가 끝나면 병원에 간다. 시안에게는 간병해야 할 엄마가 있다. 엄마는 제때 뒤집어 주지 않으면 욕창이 생겨 버리는, 눈을 뜨고 있어도 초점을 맞출 줄 모르는, 산소호흡기가 없으면 끝내는 자가호흡을 하지 못하는 존재니까.


그거 알아? 우리는 견디고 있어. 이 악취를, 시린 소독 냄새를, 좁은 침대를. 엄마는 뭘 견디고 있어?

문득, 엄마도 엄마의 좁은 몸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의 유일한 딸이라서 모든 마음을 다 받고 자랐다. 염려, 걱정, 사랑. 엄마를 사랑하면서 엄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는 게 미안하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 울음소리를 들으며 잠을 설칠 때, 기저귀를 갈 때, 우유를 먹일 때. (P.121)



그러던 중, 시안은 병원에서 해원의 오빠 해일을 우연히 마주하고 이후 해원을 찾아가게 된다. 해원과 시안은 본래 친구였으나, 해원의 엄마는 해외에 있는 동생을 보러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슈퍼 전파자가 된다. 그 과정에서 해원의 친구였던 시안의 엄마가 감염되어 식물인간이 되고, 해원의 가족은 자신들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듯 이사한다. 그런 해원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해원과 해원의 가족은 슈퍼 전파자가 된 이후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순식간에 낙인이 찍혔고, 신상이 퍼지고 비난받는 일들. 그런 일을 겪으며 해원은 이름까지 바꾼 것이다. 그러나 시안에게 그런 것은 별로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해원에게 모든 화살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비약이겠지만 더 이상 그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뭘 원하는데?

저 애가 내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의 일부라도 이해하는 것.

과거를 잊고 편히 사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것이 고약한 마음이라는 건 나도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누구의 인생은 망했는데 해원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P.148~149)



소설은 두 아이의 위태로운 마음을 번갈아 가며 짚는다.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가 식물인간 상태라는 것을 숨기다가 이야기한다. 시안은 시안대로 해원을 만나며 그동안 눌러 왔던 마음과 마주하며 엄마의 무게에 허덕이고, 해원은 해원대로 시안의 엄마가 식물인간이 된 것, 그럼에도 해원의 엄마가 결국에는 해원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죄책감에 허덕인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해원의 엄마는 엄마의 동생을 사랑했기에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감염되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건강을 돌보지 않고 직장에 나갔고, 시안의 가족을 사랑했기에 시안의 가족을 만났다. 서로를 가까이했기에 병들었고, 아팠고, 비난받아야 했고,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전염병이 갖는 비극 속에서 그러나 두 아이는 결국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을 지킨다.


시안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시안은 오롯이 사랑한다. (오롯이는 모자람이 없이 온전하다는 뜻도, 고요하고 쓸쓸하다는 뜻도 가진다.)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나누지 못한 엄마를, 최선을 다해 온전히 돌본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도 고요히, 쓸쓸히, 묵묵히, 혼자서 엄마가 좋아하던 페퍼민트 차를 우리며 간병의 시간을 견뎌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다. 힘듦을 말할 수 있고 고통을 나눌 수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사랑했기에 아프게 되었으나 결국 그 아픔을 견뎌내는 것도 사랑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탓하고 누군가에게 모진 마음을 털어놓고, 그럴 수 있어야 개운함도 찾아온다. 마치 한 잔의 페퍼민트 차를 마시듯, 매운 순간이 지나간 후의 상쾌함을 맛보듯 말이다.


그러니 사랑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후회는 이름만큼이나 늘 한 발짝 늦어서 괴롭다.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갑자기 관계가 단절되더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후회 없도록 말이다. 소설을 둘러싸고 있던 띠지에는 "준비할 시간이 있다면,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다."라 되어 있다. 결국 사랑을 말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짧은 문장에 담긴 후회와 슬픔을 알아챌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을 이야기해야 한다. 사랑에 상처받고 아플지라도 결국 삶을 살아가게 하는 추동력은 오로지 사랑일 것이므로.


우리는 재난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병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게 마지막 대화라는 걸 알았다면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건넸을까? 엄마는, 우리는,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다.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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