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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소녀 ㅣ 사이드미러 3
소향 지음 / 텍스티(TXTY) / 2026년 3월
평점 :

『모방소녀』(소향/텍스티)
소향 작가의 소설 『모방소녀』를 읽으며 먼저 떠오른 것은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의 형상이었다. 우리 사회가 숭상하는 입시 제도와 신분 상승의 사다리, 그리고 그 정점에 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응집된 이 작품은, 마치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영혼을 삼키는 욕망의 항아리로 들어가는 여정 같았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욕망의 갈증은 더욱 깊어지고,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를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작품 속 인간 군상의 모습에서 서늘한 공포감이 전해졌다.
작품에서 송나희 회장과 나영리라는 두 인물이 대비를 이룬다. 송나희는 자신의 결핍과 트라우마를 보상받기 위해 딸 송초롬을 도구화한다. 자녀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성공을 증명할 '전시품'이자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그녀의 모습은, 주인공 나영리가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 거래의 '대역'이 되기를 자처하는 모습과 대비된다. 영리는 송나희가 쌓아 올린 견고한 거짓의 성벽 안으로 잠입하여, 그 화려한 모래성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증명하는 균열의 시작점이다. 욕망의 항아리는 바닥이 없어, 채우려 할수록 그 안의 어둠은 더 깊게 입을 벌린다. 영리는 아빠를 살리겠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로 시작했지만, 타인의 삶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불해야 할 대가가 결국 자신의 영혼임을 직감하며 고뇌한다.
이 소설은 독자를 쉴 틈 없이 몰아붙인다. 페이지 터너로서의 작가의 힘은 대단하며, 자극적인 소재와 빠른 전개는 마치 한 편의 감각적인 영화를 보는 듯한 쾌감을 준다. 하지만 그 속도감에 취해 달리다 마주하는 결말은 다소 허무하기도 하다. 모든 진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과정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허무함이야말로 어른들이 쌓아 올린 욕망의 바벨탑이 지닌 본질적인 속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불쾌한 인물은 일타 강사 현건우였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그 세상의 가장 추악한 밑바닥을 지탱하는 부품이 되겠다고 자처한다. 괴물을 잡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괴물의 논리에 투항한 것인지 모를 그의 행보는 지독히도 역겹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잘못된 시스템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궤변은 이 시대가 앓고 있는 가치 전도의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견고한 성벽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파도 한 번에 허물어질 젖은 모래성에 불과했음을 목도하는 순간, 서사는 비로소 차가운 진실의 얼굴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절망만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소신 있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영리의 아버지, 송 회장 저택의 상주 집사 설은정, 비서실장 공형진, 그리고 정운식 선생 같은 이들은 욕망의 항아리에 빠지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낸다. 그들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와도 같다.
마지막 장에서, 영리가 다니는 대학 교수가 던진 "학교 이름에 기대기보다 자기 색을 만들라"는 조언은 작가가 전하는 가장 명확한 함성이다. 부모의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라는 가짜 옷을 벗어던지고,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라는 그 외침은, 거짓의 굴레를 벗어던진 영리와 초롬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게 만든다. 아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허구의 모래성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만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비록 삶이 비루할지라도, 타인의 삶을 흉내 내는 '모방소녀'로 살기보다는 불완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구원임을, 이 책이 말하고 있다.
2026.03.12
*이 글은 출판사에서 보내주신 가제본을 읽고 작성한 서평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