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ㅣ 문학동네 청소년 68
문이소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2월
평점 :
<내 정체는 국가 기밀, 모쪼록 비밀> (문이소/문학동네)
기분 좋은 작품이다. 남들에게 그 정체를 ‘모쪼록 비밀’로 하고픈 작품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미있는 단편집이라니! SF라는 큰 틀 안에 있지만,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바는 훨씬 더 넓고 깊다. 아직 따스함이 가시지 않은 삶은 달걀이, 껍질을 깨고 통통 튀는 소설이다. SF 장르면서도 예술혼이 살아 있고, 그 안에 약자에 대한 연민과 따뜻함이 스며든 작품이다. 문학계 거장의 풋풋했던 시절의 작품을 읽는다면, 바로 이런 느낌이리라.
이 책은 가볍다. 얼마든지, 한없이 무겁게 풀어낼 수 있는 소재를 가뿐하게 다룬다. 폭우로 흙더미에 무너진 버섯 재배사와 버섯균 이야기를 미래에서 온 종균 도둑 이야기로 사뿐히 밟아낸다. 예상치 못한 결말과 마주하면 아쉬움보다는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첫사랑에 각성한 두 사람과 또다시 보고 싶은 그 도둑도. (소녀 농부 깡지와 웜홀 라이더와 첫사랑 각성자)
이 작가는 제목 짓는 재주가 있다. ‘젤리의 경배’가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런 이야기를 펼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다. AI의 초상화를 그려야 하는 무명 작가. 젤리와, 그 작가의 그림에만 꽂힌 AI. 너무나 다른 둘이, 자신에 관한 고민에서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 흥미로운데, 그 속에 금전 거래와 납치, 첩보와 예술이 함께 들어 있다. 진짜다.(젤리의 경배)
이전의 기억은 잃은 채, 촉감만 물려받은 마요린은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인 그 ‘유영의 정체’를 찾아 지구로 온다. 그가 찾는 유영은 무엇일까? 수많은 유영 중에, 학교도 다니지 않고 팬도 없는 유튜버 유영을 만나 도자기 체험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 요린이는 ‘유영의 정체’를 찾는다. 따뜻한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작품이다. 자신의 기억을 찾아 지구에 온 외계인이 도자기를 체험하며 갖는 관계라니. 생각만 해도 복잡난해하지만, 진짜 따뜻하다.(유영의 정체)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도 흥미롭다. 오랜 세월 병상에서 지내온 춘희 여사가 회복하여 딸과 오붓한 전원생활을 하는 장면, 급성 신장염으로 고새아던 애완견 흰돌이가 가족들과 캠핑 가서 함께 놀고 지키는 이야기, 가족과 함께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고 싶어 하던 영지. 이들의 떠나보내는 모습은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이토록 좋은 날, 오늘의 주인공은)
고양이 ‘누더기 여사’의 죽음으로 홀로 남게 된 막내를 납치한 대걸레 마녀를 찾기 위한 반려 로봇 ‘봉지’의 이야기는 유쾌발랄하다. 쓰다 질렸다고 구박받아 도망쳐 나온 반려로봇 봉지가 길거리 동물들을 보살피다 벌이는 유쾌한 복수극과 허당기 가득한 반려로봇을 보는 재미가 있다. 약자를 대하는 이 로봇의 행동 방식이 어딘가 아이를 닮은 구석이 많고,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을 시작한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물론 유쾌, 발랄, 코믹은 덤이다. (봉지 기사와 대걸레 마녀의 황홀한 우울경)
이 다섯 작품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미래, SF 라는 점 외에도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남성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이란 점은 아쉽다. 다만 주인공이 그렇다는 것이지 남녀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히 하고 싶다.
또한 다루는 소재가 매우 넓고 기발하다. 버섯재배, 유화, 도자기, 죽음, 길고양이처럼, 익숙한듯 새롭고, 독특하지만 친근한 소재라는 점이 좋다. 삶과 과학, 미래와 예술, 기계와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고, 그 모습이 즐거운 하모니를 이룬다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젊은 농사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러스트레이터, 학교를 그만둔 아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람, 은둔형 외톨이 예술가, 집을 나온 반려로봇 등, 사회가 그어놓은 틀과 선, 그 경계에 있는 이들을 다룬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또한 탱탱볼처럼 통통 튀는 작가의 문장 표현력과 그러면서도 넌지시 보여주는 깊은 주제, 너무 진지할까 봐 걱정이 많은지 진지와 눈물을 닦을 유쾌함을 곁들인 점이 인상 깊다
글밥이 적고 단편으로 이뤄져 있으며, 각 이야기마다 나눌 생각이 무궁무진하다. 초등 고학년 이상 청소년들에게 추천한다. 어른들에겐, ‘모쪼록 비밀’이다.
2024.01.14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자유롭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내정체는국가기밀모쪼록비밀
#문이소
#국가기밀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