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지음, 최희성 편역 / 아이템하우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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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예전에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아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책은 이윤기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인문학적 해석이 어우러져, 단순히 신들의 계보를 훑는 것을 넘어 신화가 우리 삶과 예술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짚어주고 있어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이다. 이 책, [하룻밤에 읽는 오디세이아]는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로 묶여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 모험담 및 귀환길에 이르는 여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트로이 전쟁의 발단과 전개 과정을 알고 보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10년 전쟁을 끝낸 결정적 계략인 목마를 고안한 사람이 바로 오디세우스이다. 그가 단순히 힘센 용사가 아니라 지략가라는 점을 알고 보면, 모험 도중에 만나는 괴물들을 힘이 아닌 꾀로 물리치는 과정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귀환 직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는데,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가 복수하는 과정은 오디세이아 곳곳에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가 본받아야 할, 혹은 경계해야 할 사례로 계속 언급되고 있다.

전쟁 당시 그리스 편을 들었던 아테나 여신은 오디세우스를 계속 돕고, 오디세우스의 귀환길에도 그를 끊임없이 돕는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하자 포세이돈은 분노한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포세이돈은 오디세우스의 귀환길을 계속 방해하여 아테나 여신과 대립한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바다의 신에게 미움을 사 10년을 떠도는 과정은 인간의 뜻과 의지가 거대한 신의 섭리 앞에서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는 단순히 똑똑한 영웅이 아니라, 때로는 비겁해 보일 정도로 생존 본능이 강하고 인간적인 결점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결점을 드러내며 나약해질 때마다 아테나 여신은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지략가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한다. 아버지 없이 자라 기가 죽어있는 텔레마코스에게 아테나가 다가가는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아테나는 눈부신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텔레마코스가 직접 배를 띄우고 스파르타와 필로스로 여행을 떠나도록 등을 떠밀어준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멘토(Mentor)‘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신비로움이 현실과도 연결되는 기분이 든다.


이 책은 사실 ‘오디세우스의 복수‘라고 제목을 붙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후반부에는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구혼자들이 남의 집 안방에서 주인 행세를 하며 조롱하는 상황에서도,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가 복수를 위해 감정을 억누르는 장면에서는 나까지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거지로 변장한 아버지를 곁에 두고 구혼자들의 온갖 모욕을 견뎌내는 텔레마코스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영웅이 거지 옷을 입고 음식 찌꺼기를 던지는 조롱을 견디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아테나 여신의 조언대로 때를 기다린다. 이 인내심이 단순한 참음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이라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신도 돕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 책은 신탁이나 신의 도움이 단순히 요행이 아니라, 오디세우스 부자가 보여준 지혜와 용기에 대한 신의 응답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더 설득력 있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 같다. 칼립소라는 여신이 불로장생을 약속하며 붙잡아두지만,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허락과 도움을 받아 결국 죽음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 선택 자체가 신과 인간의 경계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지점인 것 같다. 생생한 그림과 신비로운 이야기가 어우러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오디세우스의 모험담. 평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는 독자, 트로이 목마 후일담이 궁금한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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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육혜원.정이화 옮김 / 이화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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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16세기 영국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여인, 메리 스튜어트. 츠바이크는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라는 두 여왕의 대립을 마치 숙명적인 연극처럼 묘사해서 긴장감과 몰입감을 높인다. 또한, 16세기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 종교 개혁 등이 등장하는데 츠바이크는 당대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 지식이 없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소설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아 평소 고전이나 현대 문학의 심리 묘사를 즐기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메리 스튜어트는 당대 유럽에서 가장 매혹적인 여왕으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슈테판 츠바이크 역시 그녀의 비극이 단순히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그로 인한 격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인근 여러 나라의 언어에 유창할 정도로 명민했으며 음악, 문학, 예술 분야 등에서도 다재다능했다고 한다. 메리 스튜어트의 용모가 궁금해서 구글링을 해봤는데 180cm가 넘는 늘씬한 키의 소유자라고 한다. 그녀는 말을 타며 매 사냥을 할 정도의 기백도 갖추고 있었다. 단순히 용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팔방미인이자, 기인으로서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왕이었던 것이다.

남성들에게 메리 스튜어트를 차지한다는 것은 사랑을 얻는 동시에 권력의 정점에 다가가는 것이었다. 이 점이 수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앞다투어 그녀에게 구애하게 만든 강력한 촉매제가 된 것이다. 메리의 인생을 뒤흔들게 되는 세 명의 남편들은 드라마틱하다. 첫사랑이자 요절한 프랑수아 2세는 메리에게 여왕으로서의 화려함을 안겨주었다. 단리 경은 메리가 첫눈에 반한 남성이지만, 질투와 야망으로 그녀를 괴롭힌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으로 메리의 몰락이 시작된다. 세 번째 남편인 보스웰은 단리 살해의 배후로 지목되었음에도 메리가 강렬하게 빠져들었던 인물이다. 츠바이크는 이 대목에서 메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오직 열정에만 치중한 과정을 아주 처절하게 묘사한다.

책의 전반이 메리 여왕의 영예로운 삶과 후광에 집중되어 있다면, 후반은 그녀의 몰락이 어떤 형국으로 이어질지에 초점이 잡혀 있다. 소제목만 봐도 예측이 되면서도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평생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지만, 서로의 존재에 사로잡혀 살았던 두 여왕의 심리전이 이 책의 핵심이자 압권이다. 메리 여왕이 젊은 날에 여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통제한 얼음 같은 군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는 것이 두 여왕의 대립되는 면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 문제를 유럽 강대국들(스페인, 프랑스 등)을 조종하는 최고의 외교적 미끼로 활용했으며, 결혼하지 않았기에 누구와도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열어두어 잉글랜드의 안전을 지키기도 했다. 또한, 당시 여왕이 결혼한다는 것은 왕편에게 실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는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권력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어 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정치적 라이벌로서 증오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누리는 자유로운 열정을 남모르게 동경하기도 했다. 츠바이크는 엘리자베스가 메리에게 내린 잔혹한 판결들이 사실은 가지지 못한 삶에 대한 깊은 결핍과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p.23 ˝여인에게서 물려받은 왕관이 또 다른 여인과 함께 사라지리라˝

정말 소름 끼치지 않는가? 메리의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임종 직전 남긴 이 한마디는 스튜어트 왕조의 비극을 관통하는 가장 잔혹하고도 정확한 예언이었다. 제임스 5세는 병상에서 딸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 말을 남겼다. 그는 아들이 아닌 딸이 왕위를 잇는다는 것이 왕조의 몰락 혹은 단절을 가져올 것이라고 직감했던 것 같다. 메리가 처형당하고 훗날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앤 여왕에 이르러 가문의 대가 끊기며 영국과 스코틀랜드가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을 보면, 이 예언은 정말 무섭도록 들어맞는 것 같다.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관을 물려받았지만, 그 왕관은 그녀에게 축복이 아닌 무거운 짐이자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던 여왕이 단 한 번의 격정적인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독자에게도 큰 감정적 파장을 준다. 만약 그녀가 엘리자베스처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통치자로만 살았다면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리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그 솔직함이 정치적 약점이 되어 라이벌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었다. 비록 왕좌에서는 내려왔지만, 그녀의 드라마틱한 몰락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를 매료시키는 강력한 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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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람들
이동원 지음 / 라곰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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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책은 총 10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작가는 ‘그것이 알고 싶다‘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메인 PD이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아 읽기도 전에 기대가 컸다. 작가는 어느 정도 실화를 기반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각기 다른 열 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냥저냥 무난한 이야기도 있는 반면, 충격적이면서 엽기적인 이야기도 있다. 나에게는 그 충격적인 이야기가 맨 마지막 작품에 해당되었다. 제목이 ‘가해자 H의 피해 일지‘인데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가해자인데 피해 일지라니! 평범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30대 우체부 남성은 어느 봄날에 늘 다니던 교회에서 운명의 여자와 만난다. 그녀와 깊이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하기에 이르지만 그녀는 결혼만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뭔가 이상했지만 남성은 그녀를 사랑했으므로 덤덤히 그녀 곁을 지킨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매일 아침 우편 등기가 오고 있고, 그녀 역시 매일 누군가에게 우편 등기를 보낸다. 알고 보니 그녀는 인플루언서인 그녀에게 SNS로 악플을 남긴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소장을 날리고 협박하며 보상을 받고 있었다. 남성은 묵묵히 그녀를 도우며 어느샌가 같이 그녀와 함께 보상금을 받는 기쁨을 누리고 재산이 늘어가는 걸 즐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녀가 만취한 사이에 그녀의 핸드폰과 경찰서 사이트에 몰래 접속해서 그녀의 정체에 대해 알아버리고 그는 패닉에 빠진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속이고 뒤에서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다면 어떨까.



나는 요즘 OTT로 크리미널 마인드를 시즌 1부터 보고 있다. 그래서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왔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프로파일러라는 직업은 아무나 가질 수 없기도 하고 주변 지인 중에도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리라.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으로만 봤을 뿐. 하지만 소설 속 여주인공에게 프로파일링은 그냥 덤덤한 루틴이다. 범죄 현장 속 사진과 서류상의 기록만 보고 범인을 유추하고 브리핑하는 것인데 매번 운 좋게도 그녀가 말한 대로 용의자가 좁혀지고, 주위에서는 그녀를 치켜세운다. 비법은 따로 없다. 그냥 임기응변에 강한 것이 장점일 뿐. 그녀는 사건 해결을 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헤어지자는 남친의 문자를 받고 분개한다.


삼십대의 인턴기자가 정규직이 되기 위해 고군부투하는 이야기도 있다. 대학교수가 여제자를 성추행한 사실을 알고 이 일을 기사로 낼지 고심한 끝에, 피해자 가족들과 출세를 위해 기사를 내버리고 만다. 정규직이 되긴 했는데 결국 그를 기다리고 있는건 교수쪽 변호사가 제기한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소송이라는 씁쓸한 결말.


소설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소설을 읽고 비슷한 일을 겪은 누군가는 씁쓸해 할 것이며, 역시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며 위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욕망과 어두운 내면이 고개를 들고 발현되었을 때 불행이라는 것이 어김없이 쫓아오는데 이것을 인지할 때쯤이면 이미 늦는다. 그래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불행만을 논하고 있지 않다. 인생의 밑바닥을 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우연한 일을 계기로 행운을 거머쥐고 역전하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돌이켜보면, 불행이라고 여겼던 일이 의외로 행운으로 작용해 좋은 쪽으로 흘러간 적이 있다.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말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나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언젠가 그 불행의 씨앗이 나에게 날아온다는 서늘한 교훈을 남겨주는, 정신이 번쩍 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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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혜영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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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를 ‘아웃‘이라는 책을 읽고 알게 되었다. 아주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고, 결말에 다다를 때까지의 여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번 소설 또한 ‘아웃‘에 뒤지지 않는 사회적 논쟁이 될 수 있는 소재라는 것과, 뒤통수를 치는 아찔한 결말에 역시 기리노 나쓰오구나 감탄하게 되었다. 이름을 외울 수 있을 만한 개성있는 중심 등장인물 몇 명, 사회적으로 불편한 부분을 건드려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소재, 예측할 수 없는 결말. 이 삼박자가 제대로 어우러져 가독성은 물론,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결말이 궁금해서 초조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리키는 인구가 5천 명도 안 되는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도쿄로 상경한 스물아홉 살의 여성이다. 도쿄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지만 정규직이 아니라서 언제까지 계속 일할 수 있을지 불안하고, 비싼 도쿄 물가와 생활비에 허덕이며 생활고에 시달린다. 요시코 이모가 돌아가셨지만 고향으로 갈 차비조차 없고, 매일 편의점에서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 지긋지긋해져 그녀는 고심 끝에 난자 제공을 해서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업체에서는 리키에게 난자 제공을 넘어서 대리모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한다. 대리모의 경우, 단순히 난자 제공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솔깃한 제안과 함께.


리키가 대리모를 선택했다는 점이 가장 비극적이다.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로 내린 결정이지만, 이 대목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내린 선택을 과연 진정한 자유 의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때, 사회는 개인의 절박함을 거래로 정당화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는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끝단을 목격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믿고 싶지만, 소설 속 세상에서는 유전자, 자궁, 그리고 태어날 아이의 미래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된 비즈니스 플랜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의뢰인 부부의 남편인 모토이는 이것을 프로젝트라 지칭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하다. 생명을 잉태하는 숭고해야 할 행위가 비즈니스나 프로젝트라는 차가운 경제 용어로 치환되는 순간, 인간의 존엄성은 숫자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윤리적인 시점에서 벗어나, 리키의 아이가 과연 누구의 아이인지도 너무 궁금하다. 기리노 나쓰오는 끝까지 명확한 친부 확인 검사 결과를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을 아주 지독한 궁금증 속에 남겨둔다. 굳이 친부를 밝히지 않은 이유는, 누구의 아이인가보다 누구의 아이여도 상관없는 시스템의 비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리키는 결국 누구의 아이인지 확인하기보다 아이를 데리고 떠나는 길을 택한다. 이는 아이를 누군가의 소유물로 확정 짓지 않고, 오직 자신의 아이로서 마주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통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요즘은 이처럼 열린 결말이 좋은 것 같기도 하다.

제비는 해마다 둥지를 틀 곳을 찾아 돌아오지만, 현대 사회의 가혹한 자본 논리 속에서 리키 같은 인물들에게는 돌아갈 따뜻한 집이나 안전한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단정적인 표현은 생명조차 거래의 대상이 되는 비정한 현실에서 감상적인 구원이나 해피엔딩은 없다는 작가의 냉철한 시선을 반영한 것이겠지. 어쩜, 책 제목을 이렇게 찰떡같이 지었을까. 역시 기리노 나쓰오, 이번에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작품 속에서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추악한 욕망이나 치졸함이 미화 없이 그대로 드러나지만, 그 날것의 서늘함을 표현하는 방식이 과연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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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한 세계 크로스 1
김연수.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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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우리들의 실패​

김연수 작가는 손동하라는 인물을 통해, 거대한 역사적 사건 뒤에 결국 상처받은 개인의 사소하고도 아픈 기억이 도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처음엔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싶었다. 손동하는 대통령 친인척의 국정 개입 사건에 연루되어,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안 가결 등이 이루어지기까지 핵심적인 대통령의 오른팔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다. 일본으로 도망친 손동하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는 다급하게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엮는다. 국내에서는 손동하를 비난하는 여론이 거세지고 그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는 죗값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폭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기자가 손동하를 인터뷰하면서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가 직접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손동하의 어린 시절, 그의 부모님 이야기, 개발되기 전 서울 강남의 이미지라든가 친척 결혼식에 갔다가 만나게 된 정혜인이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회상하는 형식으로 언급된다. 아버지가 입에 달고 사는 ˝서울에 남았더라면˝이라는 말은 손동하의 입장에서 결국 지금 가족이 겪는 가난과 고생이 실력 때문이 아니라 운이나 타이밍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버지가 후회만 하고 있을 때, 손동하는 그 ‘지긋지긋함‘을 동력 삼아 서울로 입성하고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간다. 손동하가 보기에 아버지는 이미 실패한 인생이다. 하지만 손동하 본인 역시 권력의 핵심에서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파국을 맞이하며 또 다른 방식의 실패를 겪는다. 아버지가 과거를 후회하며 보낸 시간들이나, 손동하가 권력을 휘두르며 보낸 시간들이나 결국 본질적인 허무함은 같다는 점이 이 소설의 서늘한 점이 아닐까.

결정적 순간

손동하의 딜레마가 국가적 파국이라는 역사적 무게에 짓눌려 있다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에서는 또 다른 결의 현대적이면서 서구적인 윤리적 갈등이 느껴진다. 주인공 가스미의 고민은 예술의 자율성 대 사회적 윤리라는 아주 날카롭고 실제적인 칼날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인 가스미에게 사카키의 사진전은 경력의 정점이 될 기회지만, 그녀가 발견한 사진은 그 기회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는 시한폭탄이다. 사카키의 사진이 예술적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 대상이 착취된 것이라면 그것을 예술로 여길 수 있을까? 가스미는 미학적 가치가 도덕적 결함을 덮을 수 있는가라는 고전적이고도 괴로운 질문에 직면한다. 가스미는 사진을 본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를 묵인하고 성공을 쟁취할 것인가, 아니면 폭로하여 예술계를 뒤흔들 것인가를 고민한다.

크로스 인터뷰 : 전시되지 못한 것들의 자리

p.189 ˝간절히 원하던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윤리적 딜레마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작품에서 이토록 곡진하게 표현하다니! 두 작가 모두에게 경외감이 느껴진다. 작품 해설 대신에 두 작가가 서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것 또한 마음에 든다. 작품 속 두 주인공 모두 성공을 눈앞에 두고 윤리적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 태도와 시점은 사뭇 다르다. 김연수 작가의 작품은 이미 ‘실패‘라는 결론이 난 상태에서 시작하며, 손동하가 정치적 파국을 맞이하고 그 기원을 찾기 위해 유년 시절의 먼지 쌓인 기억들을 하나씩 들춰내는 방식이다. 반면 가스미의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카키의 사진을 발견한 그 ‘결정적 순간‘부터 시계 초침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결국 두 소설 모두, 우리는 우리를 증명해주는 소중한 무언가(정치적 신념 혹은 예술적 심미안)가 사실은 아주 추악한 바탕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두 작가는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실패)를 견디며 살겠습니까,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미래(결정적 순간) 앞에서 도박을 하겠습니까?˝ 참으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작품이다. ‘근접한 세계‘라는 제목을 생각했을 때, 단순히 시간이라는 것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미래의 어느 지점을 이미 결정짓고 있다는 감각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자유의지와 운명론에 대해서도 사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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