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소각 지침
마커스 클리워 지음, 김지원 옮김 / 문학수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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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page.107 ˝이게 만약 장난질이라면 난 3천 달러를 갖고 도망칠 거야. 그리고 만약에 그냥 노인네의 망상증이라면 주말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큰돈을 버는 거니까, 윈-윈이지.˝

허름한 원룸 아파트에 여동생 젬마와 단둘이 사는 메이시. 집세는 밀려 있고 생활비조차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사이트에서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솔깃하면서도 모호한 일자리가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바로 노령의 남편을 돌볼 간병인을 구한다는 구인 공고. 메이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어 버스를 타고 해안가 외딴 저택으로 면접을 보러 간다. 그 저택의 집주인인 그레이스라는 여자는 메이시에게 제안한다. 사흘 동안 저택의 관리인이 되어 준다면 총 9천 달러의 급여를 주겠다고 말이다. 그녀의 남편을 돌보는 일인 줄 알았는데 남편은 죽었고 집을 돌보아 달라니!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던 메이시는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레이스가 선급금으로 3천 달러를 지급하자 기뻐하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든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 젬마에게 면접 보러 갔던 일을 얘기하자 젬마는 언니가 걱정되어 그 저택에 가지 말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사흘에 9천 달러를 벌 수 있는 기회다.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이시는 이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어코 저택에 발을 들인다.


메이시가 저택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따라야 하는데, 특이하게도 그레이스의 남편인 데이비드가 그 규칙들을 미리 영상으로 찍어 놓았다. 그레이스는 비디오테이프를 건네주며 메이시에게 그 영상을 숙지하라고 한다. 젬마와 같이 영상을 보면서 메이시는 규칙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막상 그레이스가 저택을 떠나고 혼자 남게 되자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치게 된다. 심지어 저택에는 브라우니라는 고양이까지 있는데 브라우니의 한밤중 기묘한 행동을 보고 메이시는 두려움이 가중된다.

page13.˝이름을 붙이면 사악한 것들에 형체가 생기고, 머릿속에 그것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를 잠 못 자게 만드는 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내는 소리였다.˝


데이비드가 영상으로 신신당부한 규칙은 집안의 조명과 토끼, 방문자에 대한 것이다. 제한된 시간 내에 조명이 켜져 있으면 안 될 것, 집 안에서 토끼가 보이면 10분 안에 잡아 밖으로 내쫓아야 하며 10분 안에 잡지 못하면 산 채로 소각할 것,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 사이에 창백한 푸른 눈을 한 자가 찾아오면 절대 들키지 말고 숨을 것. 자, 우리의 주인공 메이시는 규칙을 잘 지키면서 저택을 돌보게 될까? 그리고 눈치챘겠지만, 이 규칙들을 하나라도 어기면 도미노처럼 재앙이 들이닥칠 것이다.

하지만 겨우 7초 차이로 메이시는 첫 번째 규칙을 어기고 만다. 그리고 메이시에게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우수수 일어난다. 급기야 토끼를 발견하고도 차마 소각하지 못한 채, 메이시는 우버를 불러 달아나려고 한다. 하지만 메이시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와 맡은 소임을 다하고자 결심한다. 메이시는 관리인의 임무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까?


참으로 흥미진진한 줄거리와 제목이다. 시놉시스만 읽어도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이걸 영상화하면 무척이나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푸른 눈의 방문자로 인해 메이시의 비밀이 밝혀지고, 메이시의 멘탈이 무너지면서 그녀의 환각과 섬뜩한 공포가 나에게도 느껴졌다. 메이시가 푸른 눈의 방문자만큼은 피했으면 좋았을 것을!

인간이 머릿속으로 만들어 내는 공포가 가장 무서운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돌이킬 수 없는 행동들과 나약한 마음가짐. 나만 알고 있겠지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에 의해 들추어졌을 때 그 수치심과 죄책감. 메이시가 갖고 있는 트라우마와 비밀들을 이렇게 건드린다고? 꽁꽁 감추고 있던 마음속 두려움을 이렇게 파헤친다고? 너무 가혹한 일이다. 마음속 공포가 실제로 눈앞에서 재현된다면 누구라도 메이시처럼 멘탈이 흔들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메이시를 멍청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 무덥고 지치는 여름밤,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시각적 공포를 안겨 주는 기괴한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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