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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 ㅣ ANGST
김인숙 지음 / 북다 / 2025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고딕 소설 특유의 서늘하고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다 읽고 나서도 잔상이 길게 남는 작품이다. 고딕 소설은 초자연적 공포를 다루어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근원적 공포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작가는 최선을 다해 공포를 발산하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독자는 최선을 다해 공포 뒤에 숨겨진 미스터리의 정체를 파헤쳐야 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고딕 소설로서 성공한 작품일까.
모유리의 할머니 최무자의 죽음은 이 소설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최무자는 평생을 타인의 시선과 과거의 비밀, 그리고 죄책감을 쓰레기라는 물성으로 치환해 집 안에 쌓아두었다. 그녀를 짓누른 것은 물리적인 쓰레기 더미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이 평생 버리지 못하고 짊어지고 온 과거의 무게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결국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보하는 그 집의 상태를 모유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최무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혹은 죽음 이후의 상황을 가장 먼저 인지했을 가능성이 큰 인물이다. 고딕 소설에는 보통 주인공의 일상을 흔드는 외부인이나 비밀을 간직한 인물이 등장한다. 정보하는 이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독자를 가장 혼란스럽게 만드는 안개 같은 존재이다. 쓰레기더미 집이라는 폐쇄적인 공간(과거 모유리의 연인으로서 둘만의 친밀했던 관계)과 산1번지 외부 세계(현재 구청 직원으로서 모유리를 관찰하는 입장)를 연결하는 듯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듯한 이질감을 풍기기 때문이다. 마치 방관자처럼. 정보하는 한때 모유리의 남자 친구였고 모유리를 아주 좋아했다. 모유리를 도와줄 조력자처럼 보였지만 끝내 모유리의 결핍을 건드리고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 건 아닐까. 어쩌면 모유리에 대한 기괴한 집착이었을지도. 모유리가 막대한 상속을 받을 것이라는 걸 알고는 본인도 모유리에 대한 진심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인물이다.
모유리에게 할머니 최무자는 유일한 혈육인 동시에 자신을 옥죄는 굴레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쓰레기 더미 아래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모유리에게 해방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그런데 그 쓰레기 더미 집에서 할머니 시체뿐 아니라 생존자처럼 보이는 신원 미상의 사람과 유골이 같이 발견되다니. 고딕 호러적 공포가 정점에 달하는 대목이다. 단순히 쓰레기 집인 줄 알았는데, 그 쓰레기가 인간의 잔해와 생존자까지 집어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심리적 타격을 준다. 이 모든 것이 쓰레기와 뒤섞여 있었다는 건, 그 집이 생명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진 무덤 그 자체였음을 보여주니 말이다. 최무자가 죽기 전까지 그 더미 속에서 산 사람과 죽은 자의 뼈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지 상상하면, 단순히 불결한 집을 넘어선 심연의 공포가 느껴진다.
p.209 ˝여자들은 힘이 세잖아. 살인마가 될 아들을, 살인마가 될 애인을, 그런 것도 인간이라고 살려놓으면 안 되지.˝
p.345˝너를 죽이고 그 아이를 살렸다. 너를 살리고 그 아이를 죽여야 했는데 너를 죽였다. 어쩌자고 나는 그런 짓을 했을까.˝
대체 신원 불상자는 누구이며 유골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무 궁금해서 책장을 덮을 수 없었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진실에 다가서자 그 진실 앞에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최무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신원 불상자는 누구인지, 유골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순간에 퍼즐이 맞추어지며 소름이 쫙 끼쳤다. 사실 나무 밑에 뼈들이 무엇인지 지금도 모르겠고 등장인물들의 과거와 현재, 속마음과 독백들이 뒤엉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맥락을 놓치기 쉽다. 모호하면서도 안개 속에 파묻혀 있는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것인가.
끔찍하고 기괴한 결말을 마주하고 나면, 공포보다도 최무자라는 한 여성의 생애에 대한 지독한 연민이 차오른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가장 가해자 같은 외양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처절하게 망가진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모유리에게조차 그녀는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자작나무 숲이 겉으로는 하얗고 고결해 보여도 그 뿌리는 차갑고 습한 흙속에 있듯, 최무자는 그 숲의 가장 추악하고 아픈 뿌리 역할을 했던 셈이다. 자신이 지키려 했던 것들에 짓눌려 소리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처연하게 느껴져 마음이 무겁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