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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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낙엽이 뒹굴고 쓸쓸한 정취가 공기를 타고 맴돌면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외롭고도 담담한, 혹은 세련되고 시크한 문체가 생각난다. 에쿠니 가오리 작품을 거의 다 읽어봤지만 그중 웨하스 의자는 에쿠니 가오리 소설 중에서도 가장 쓸쓸함이 묻어나면서도 죽음과 절망에 대해 객관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한다.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은 네 명이다. 유부남을 애인으로 두고 있는 나, 대학원생과 사귀고 있는 동생. 특이하게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주인공 나는 과거로부터 얽매여 있다고 해야 할지, 과거의 기억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야 할지...특히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부모님과의 기억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특별히 부모님과 애틋했던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슬픈 것이 아니라는 아빠의 말, 한밤에 부모님이 레코드를 듣던 기억, 부모님과 친했던 지인들과의 추억이 그녀의 뇌리 속에 계속 남아있다. 주인공 나는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아빠는 교통사고, 엄마는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동생과는 따로 살고 있지만 연락을 자주 하며 지낸다. 심지어 각자의 애인들을 끼고 밥을 먹고 놀러 가기도 하고 말이다.

P.127 "아빠도 엄마도 죽어 이 지상에 없는데, 여기서 나와 애인과 동생과 대학원생이 이렇게 그들의 레코드를 듣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고, 그러나 아주 자유로운."

P.166 "나는 자고,일하고, 산책하고,목욕하고,그리고 또 잔다. 가끔 애인이 찾아온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사랑을 나누고, 또 만나자는 말을 하고 헤어진다. 내 생활은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고, 덜한 것도 더한 것도 없다."

나는 이 문장이 너무나도 쓸쓸하다. 평화와 안정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을 숨기면서 처절하게 외롭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해서일까. 죽음은 딱히 슬픈 것이 아니라는 것, 누구나 언젠가 맞이하는 것이 죽음이고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서 머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생의 순간순간마다 죽음에 대해 각인하며 살아간다. 서른 여덟 살 밖에 안된 여자가 벌써 죽음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를 지배하는 생각의 고리들- 갇힌 세상, 세계의 끝, 절망, 그리고 죽음.

언니는 유부남을 사귀고 있고, 동생의 남친인 대학원생에게는 4년이나 사귄 여자가 따로 있지만 이 사실을 알고도 자매는 서로의 연애에 대해 터치를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이 2004년도에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세련되고 쿨하다.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냥 본인이 좋아하면 그뿐.

P.86 "왜일까. 나는 이제 어른인데, 때로 어린아이의 시간에 갇혀 있는듯한 기분이 든다."

어린 시절 딱히 불행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닌데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고통스럽게 기억한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자신을 스파이로 생각하며 스파이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텼을 만큼. 자신이 어른인 것을 자각하고 있긴 하지만 갇혀 있는 또 다른 내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어서 그때만큼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잠만 자고 싶은- 그러다 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p.105 "나와 애인의 계획은 완벽하다. 아무 문제도 없다. 아무 문제도. 다만,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으리란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한 가지 점만 제외하면."

위태위태한 그녀의 연애. 애인이 곁에 없으면 어김없이 절망이 그녀를 찾아온다. 이렇게 매일 외로워할 거면 빨리 다른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거나 동생과 같이 살던가 하지..하지만 그녀는 애인에게 한 번도 이혼하라거나 결혼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녀의 사무치는 고독과 외로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애인이 유부남이 아니라면 그녀의 외로움이 덜어지는 것일까. 그녀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가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P.238 "나는 애인에게, 자살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려 했다. 자연스럽게 죽을 것이란 것을, 그냥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갇혀있는 걸 싫어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그녀에게 어쩌면 애인이란 존재는 그녀를 가장 구속하는 덫이자 절망이다. 그녀는 애인이랑 헤어진 후에 막연히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자연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그녀 말대로 자살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먹고 그저 가만히 누워서 죽음이 올 때까지 말이다.

​고독했던 그녀는 항상 죽음을 의식하고 살지만 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슬픈 일도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유, 진정한 해방을 꿈꾸지만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스파이라는 것을. 웨하스 의자라는 책의 제목. 당연히 가질 수 없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지만 한때는 주인공에게 행복을 상징했던, 그러나 결국 허망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 웨하스 의자가 갖는 상징성에 마음이 아프다. 어쩜 책의 제목이 찰떡이다. 이래서 나는 에쿠니 가오리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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