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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스, 잔혹한 소녀들
에이버리 비숍 지음, 김나연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한 짓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은 있니?"
"누구 하나라도 반드시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면
그건 바로 너야."
"너만 아니었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십 대들의 학폭은 나날이 정도와 수위가 심각해지는 것 같다. SNS가 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다. 심지어 과거의 행적들이 낱낱이 파헤쳐 지고 잘나가는 연예인들이 하루 아침에 학폭 가해자가 되어 소리 없이 파묻히는 일이 다반사다.
학폭과 왕따를 일삼는 소녀들의 무리, 그녀들의 이름은 하피스다. 우리나라식으로는 칠공주파, 흑장미파가 되려나? 하피스는 '여자의 얼굴을 가진 맹금류'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괴물이라고 한다. 하피스의 멤버는 엘리스, 매켄지, 올리비아, 코트니, 데스티니.
소설의 화자 에밀리의 직업은 상담 치료사다. 하지만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 상담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에밀리 역시 하피스의 멤버였기 때문이다. 에밀리는 14년 전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치료사가 되었다. 왕따나 폭행을 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올리비아의 자살 소식을 엄마에게 전해 듣게 되고 얼굴이 보이지 않는 소녀가 피를 흘리는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게 된다.
에밀리는 하피스의 멤버들과 연락을 끊고 산지 오래다. 그 흔한 페이스북 계정도 없이 자신의 소식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를 바라며 그냥 혼자 조용히 살아가가기를 바랐는데 코트니가 연락을 해 온 것이다. 올리비아의 장례식장에 같이 가서 추모하자고 말이다. 14년이나 흐른 지금, 에밀리는 이 상황이 달갑지 않다. 하피스 멤버들을 다시 만난다면 분명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과거의 그 일이 더 떠오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얼마 안가 데스티니의 자살 소식까지 들려오면서 에밀리와 코트니는 14년 전에 하피스 멤버들이 괴롭힌 그레이스가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에밀리와 코트니는 올리비아와 데스티니가 어떻게 자살까지 이른 것인지 궁금해서 그녀들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레이스의 행방을 쫓는다.
사실 에밀리는 혼자 남모르게 사설탐정까지 고용하면서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진 그레이스를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는 탐정이 일부러 그레이스의 행방을 찾고서도 못 찾았다고 거짓말한 것이 아닌지 의심했고, 다시 그 사설탐정을 찾아 그레이스의 행방을 가까스로 알게 된다. 게다가 엘리스까지 어찌어찌 연락이 닿아 에밀리는 코트니와 엘리스를 데리고 그레이스가 있는 곳까지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레이스는 진작 사망했다는 것.
에밀리는 혼란스러워한다. 최근에 가끔씩 길에서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에밀리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에밀리는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밀리와 코트니는 왜 그렇게까지 그레이스에 집착하며 행방을 알아내려고 한 것일까. 물론 본인들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코트니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고 에밀리에게는 사랑하는 엄마가 있었다. 자신들로 인하여 가족들까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오자 그녀들은 목숨을 걸고 더욱더 그레이스에게 집착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수상한 엘리스의 행동으로, 에밀리는 직감적으로 이 모든일에 엘리스가 관여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챈다.
" 가끔씩 궁금해. 혹시라도 너희가 날 따로 불러내서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근데 아무도 사과를 안 했다는 거지. 결국 하피스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진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보다 더 나쁜 년이 돼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어."
책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데,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엘리스의 기억에 의존하여 쓰인다. 그래서 범행을 저질렀을 때의 가해자의 마음도 알 수 있었고 14년 후에 엘리스의 후회하는 심정도 절절히 느껴진다. 하지만 에밀리를 비롯하여 하피스 멤버들을 응원할 수 없었다. 나는 첨부터 그레이스가 멋진 복수를 펼치기를 기대한 독자였으니까. 훗-.
죄짓고는 못 산다는 말이 딱 맞나 보다. 결말로만 따지자면 인과응보라는 말이 떠오르긴 하는데 씁쓸한 마음만은 지울 수가 없다. 피해자가 다른 식으로 복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 번 하피스는 영원한 하피스답게 에밀리를 제외하고 성인이 된 하피스 멤버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남 탓만 하는 이기적인 여자들이었다. 그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던 그레이스와 그레이스를 인간 취급하지 않았던 악랄한 5명의 소녀들. 너무 슬프고 잔인한 일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충분히 자주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서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