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는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그런데 기억을 잃고 난 후에는 항상 시체가 내 곁에 있었다."간만에 가독성 좋은 스릴러 소설을 읽었다. 기억이라는 소재는 소설 속에서 참 많이도 다뤄지는 것 같다. 특히 추리소설 속에서는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사람의 기억이 용의자나 범인을 추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면서 허점이 되기도 한다. 이 책 역시 사람의 기억을 소재로 한 심리 스릴러 장르이다.기억.. 과연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때때로 기억은 변질되기도 하고 우리 마음대로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을 뇌 속에서 재구성하기도 한다. 책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러하다. 세 명의 인물이 돌아가면서 이미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본인들의 시점에서 본질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책의 중심인물은 택시 기사, 대학생, 형사. 이 세 명의 인물들에게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사건은 미궁 속에 빠진다.각 인물의 시점에서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사건이 전개되므로 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궁금해하면서 읽어 내려가지만 소설 중반부로 치달을수록 퍼즐이 딱딱 맞는 느낌이 든다. 진행이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다음 장이 궁금해서 순식간에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간에 트릭을 눈치채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트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결말을 알고 나면 김이 빠질 수도 있겠다.소설의 전체적인 느낌은 암울하고 무겁다. 미스터리 소설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 살인, 시체, 피 같은 단어들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연쇄살인을 방불케하는 범행이 나오기 때문에 섬뜩하기도 하다. 범인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기억을 못 한다니 끔찍한 일이지만 범인이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전후 사정을 알고 나면 측은하기도 하다. 모든 것이 과거의 기억과 닿아 있고 그것이 심리적으로 범인에게 영향을 준 것이므로. 책을 읽고 한 가지의 영화와 책이 떠올랐다. 영화를 여기에서 언급하면 스포가 될 수 있어서 말할 수는 없다. 연상되었던 책은 '살인자의 기억법'인데 이 책 역시 입소문이 많이 난 작품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독자들이 알고 시작하지만 이 책은 범인이 가려져 있다는 점, 범행 동기가 무엇인지 형사와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범인 찾기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지는 않다.다소 답답하고 고구마 같은 전개지만 끝에서 모든 것이 밝혀질 때는 아! 하고 탄식이 나왔다. 앞장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글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해되지 않았던 상황이 그제서야 이해되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인간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된 기억을 만들 수 있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결론은 누구의 기억도 믿을 수 없다는 것. 의도된 거짓말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에서 범인을 동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어쩌겠는가. 인간의 뇌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