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틀리에 - 나를 열고 들어가는 열쇠
천지수 지음 / 천년의상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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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저자는 화가 천지수라는 사람이다. 5년간의 독서를 통해 느끼고 깨달은 것을 글로 남기기도 하지만 그림으로 남기는 작업을 통해 더욱 심오한 통찰을 독자와 공유한다. 서평을 그림으로 남기는 일이라니 멋지고 대단한 일이다. 이것을 "페인팅 북리뷰"라고 한다는데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작업이기도 하지만 참 신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53권의 책을 읽고 53점의 작품을 그려낸다. 53권의 책 중에 내가 읽은 책이 몇 권 없었다는 것이 유감이지만 저자의 마음을 울리는 한 문장, 글귀가 나에게도 울림을 주어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

저자가 읽은 책을 기반으로 본인의 경험담 또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오겠지 하던 예상과 달리 작가의 사유가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철학적인 이야기들과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답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림도 잘 그리면서 이렇게까지 글도 잘 쓰다니 감탄이 나온다.


재밌는 일화도 있다. 저자는 암석 벽화 복원작업을 위해 2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느 날, 저자가 숙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드르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더란다. 눈을 떠보니 덩치 큰 개코원숭이가 보여서 큰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는데 정작 개코원숭이는 조용히 몸을 돌려 정글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이런 아찔하고도 기막힌 체험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책을 읽고 자신이 느낀 생각이나 가치관을 재구성하여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다. 어느 한 문장을 읽고 깊은 영감을 받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자유자재로 붓질을 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막막해하며 창작의 고통을 경험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책과 주옥같은 문장들을 캐치함과 동시에 그림 감상까지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는 셈이다.
더구나 그림을 그리고 그림 제목을 생각해 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이혼 여성이었던 나혜석의 작품을 읽고 부끄러웠다던 저자가 그림으로 그려낸 것은 붉은 정글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독립적 주체인 사람이라고 당당히 주장했던 그녀의 용감함에 저자는 '탐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P.39 "나혜석은 100년 후의 나에게 탐험하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탐험이란 목숨을 거는 여행이다. 나혜석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부르한 쇤메즈의 장편 소설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지하 감옥에 갇힌 죄수 네 명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들은 언젠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들만의 상상의 장소를 만든다. 저자는 그중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를 그려낸다. 제목을 시간의 발코니라고 지었다.

P.140 "지옥은 우리가 고통받는 곳이 아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저자의 특유한 사상과 예술가적인 기질이 53편의 그림에 담겨 시각적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말로 표현 못 하고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창조하다니. 거듭 말하지만 멋지고도 대단하다. 판에 박히고 식상한 서평에 지쳤을 때, 아틀리에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그림을 보고 묵직하고도 강렬한 전율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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