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방
구소은 지음 / ㈜소미미디어 / 2021년 3월
평점 :
품절


대학 시절에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라는 소설을 너무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각 챕터마다 인물의 시점이 바뀌면서 옴니버스로 이루어진 형식의 소설이었는데 이 책 역시 그러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은 명백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사건을 재해석하고 있다. 동일한 사건인데도 각 인물들이 어떻게 사건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다르기 때문에 인물들의 속마음이 나중에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 쓸쓸한 사랑을 하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은채.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기는 하나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연애에 적극적이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푹 빠져 지내는 말수 적은 남자 윤이다.

P.69 "그가 사라진다면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얼마나 피폐해질지, 생이 그대로 멈춰 버리지나 않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대신 내가 사라진다면 윤에게 나의 흔적은 얼마나 남겨질지를 상상했다."

집착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 조건 없이 윤을 사랑한 은채에게 어느 날 시련이 닥쳐온다. 하늘과 구름 그림만 그렸던 윤이 갑자기 누드화를 그리겠다며 누드모델과 같이 작업을 하고 개인전 준비를 하면서 윤의 캔버스에는 점점 여자의 누드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온실의 화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은채의 마음에는 질투와 공허함만이 가득 차고 그녀는 누드모델인 희경을 스토킹하며 희경의 정체에 대해 파헤친다.

누드모델인 희경에게 사랑은 가볍기만 하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유부남의 꼬임에 넘어가 마음과 몸을 다치고 그 후로도 이렇다 할 사랑을 찾지 못하고 누드모델로 활동하며 스튜디오 작가나 화가들과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를 한다. 하지만 희경은 남동생이 사고를 쳐서 삼천만원이 당장 필요하다. 스토킹을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은채는 희경에게 달콤한 제안을 한다.

P.226 "필요한 돈, 내가 드릴게요. 삼천만 원, 맞나요? 돈을 드리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P.224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미망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거고 벼랑 끝에 매달린 자는 풀뿌리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분별력을 잃는 것은 순식간이었고 냉정성을 잃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희경은 은채의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고 윤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간다. 그리고 역시 윤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온 주오를 맞닥뜨리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주오는 어렸을 적 자위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호되게 혼난 이후로 성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 되는 자기만의 트라우마에 갇힌 성형외과 의사이다. 주오는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후 그 자신도 직업여성을 돈으로 사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중에 같은 오피스텔에 윤이라는 화가와 희경이라는 누드모델을 알게 된다.

P.245 "예전에 아내에게서 맡았던 것과는 또 다른 솔직함. 거기에는 자유라는 호기심이 하나 더 묻어 있었다. 나는 희경을 선택했다. 그녀는 수월하게 내 손에 잡혔다."

그날, 윤의 작업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리고 주오는 왜 윤의 작업실에 몰래 들어간 것일까. 4인 4색의 치열한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지는 작가의 대담한 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각 등장인물들이 왜 그랬었야만 했는지 이해가 가는 동시에 하나같이 안쓰럽다. 집착과 질투, 결핍과 소유욕 등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본성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파헤쳐 지고 드러나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참 어렵고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4인의 남녀가 사랑과 성에 대해 갖는 인식은 다양하고도 정답이 없다. 어렸을 적의 경험과 가치관으로 터득한, 규정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이렇듯 사랑과 성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배신감과 증오, 사랑의 감정들을 나도 그 역할이 되어 고스란히 느끼고 공감해 본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그들이 받았던 상처는 극복되었을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주오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인생은 끝없는 착각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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