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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눈이 닿는 곳은 모두 촛불이었다. 한 점 한 점은 반딧불처럼 갸날팠으나 수만 개가 모이니 그건 불의 바다였다. 나는 진선이와 함께 촛불을 번쩍 들고 목청껏 외쳤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대열 앞에서 긴박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물대포다!" 정말 시커먼 벌레 같은 것들이 클클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들은 사나운 눈을 희번득거리며 찢어지는 소리로 위협을 했다. "좋은 말 할 때 해산하라. 싹 쓸어버리기 전에" 하지만 벌써 사흘 동안 물대포와 싸워 온 군중들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세탁비! 세탁비!"를 연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와 진선이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긴장이 감도는 순간, 빌딩 창문으로 물방울 무늬 옷을 입은 피에로가 툭 튀어나왔다. 피에로의 손엔 하얀 깃발이 들려 있었다. 그가 깃발을 쳐드는 순간, 물대포가 발사되었다. 그런데 뿜어져 나오는 액체는 물이 아니라 시커먼 진흙이었다. 어느새 군중들은 허리까지 차올라오는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나와 진선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진흙도 아니었다.   

'이건 초콜릿이잖아?'  

순간 주변이 쥐죽은 듯 적막했다. 난 놀라서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다들 중세의 수도사처럼 두건을 쓰고 있었고 마치 기도라도 드리듯 촛불을 모아 쥐고 있었다. 들리는 소리는 더 이상 경찰 방송이 아니라 흡사 장송곡이었다. 심지어 진선이도 두건을 푹 덮어썼는데 두건 속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모두 얼굴이 있어야할 자리에 우물 속 같은 칠흑만 있었다. 

점점 장송곡이 커졌다. 나는 차가운 초콜릿 진창에서 뼛속까지 벌벌 떨었다. 그런데 촛불을 든 두건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자꾸만 다가오고 있었다. "뭐,뭐예요? 왜 이래요?" 우물우물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 그때 진선이의 두건 안쪽에서 시뻘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내 이마에 닿는 그 안광을 느끼는 순간, 나는 비명을 질렀다.

 

2.
'별 그지 같은 꿈이 다 있네.' 

학교 가는 내내 꿈 생각으로 찜찜했다. 사실은 꿈만 그런 게 아니라 아침부터 식구들도 좀 이상했다. 어제 촛불 집회에서 돌아온 시각이 자정 직전이었으니 아침에 엄마가 한바탕 난리를 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벌써 사흘째 촛불 집회 간다고 학원을 빠졌고 다음날 아침엔 엄마와 싸우느라 밥을 입으로 먹는지 머리 뚜껑을 열고 처넣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는 물론 가족 누구도 촛불에 대한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았다.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가족처럼 너무도 평온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들 웃으며 제 일을 보는 것이 도리어 소름끼칠 정도였다. 

학교에 와도 낯설긴 마찬가지였다. 우리 학교는 촛불 소녀의 원조라고 할 정도로 촛불 집회 참가자가 많았고, 집회에서 받은 스티커를 책상에 붙여놓았다가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빈번했다. 지난 주말 집회에는 반에서만 열 명도 넘는 아이들이 직접 피켓까지 만들어 참여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촛불 얘기를 꺼내는 아이가 아무도 없었다. 기말고사 날짜가 적혀있는 칠판을 향해 다들 묵묵히 책상에 얼굴을 박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물대포를 맞고 한 초등학생이 실명을 했다는 둥, 동방신기도 촛불 집회에 나오기로 했다는 둥, 집회 기사를 작게 실은 그 신문은 원래 찌라시라는 둥 수다가 하늘을 찌른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이들은 이집트 벽화 속 머리와 몸이 다른 방향을 보는 인물들처럼 낯설었다. 그런데 진선은 아침 자습 시간이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야 왜 안와 빨리 와 애들이 이상해'

문자를 세 통이나 보낸 후에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온 진선은, 간밤에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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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짧은 단편소설을 하나 올려봅니다.

대략 이틀에 한 회씩 아마 5회 정도에서 연재가 끝날 예정입니다.
제목처럼 이 소설은 '촛불이 사라진' 상황에서 자신의 기억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2008년 역사를 만들었던 촛불 집회가 끝나고 2년, 과연 그 촛불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고민이 이 간단한 소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즐거운 감상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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