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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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03

사춘기의 고개를 간신히 넘어섰을 무렵. 어두운 한밤중에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음악을 홀로 자주 듣곤했다. 가만히 방바닥에 누워 부드러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으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나를 지배했고, 가끔 눈물도 흘러 내렸다. 시간이 많이 지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의 원인을 모르겠다. 다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을 무수히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고, 때로는 그런 경험이 삶의 감성을 자극해 세상 보는 눈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것을 알뿐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렇게 시작되는 <설국>은 나를 눈의 고장으로 끌어들였다. 그 마을은 눈이 많이 내려 도로와 기찻길이 끊어져 외부와 단절되는 경우가 잦은 곳이다. 그런 '설국'으로의 여행이 좋았다. 주인공 시마무라의 시선에 따라 바라다본 설국은, 어린시절 늦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밤 사이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게 변한 세상을 발견했을 때와 같은 탄성을 자아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오솔길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흰눈을 맞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달콤한 키스를 나눌 때의 푸근함과 달콤함도 느끼게 했다.

<설국>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한 사건이나 인물간의 심각한 갈등은 없다. 대신 인간 언어의 아름다움이 흰눈에 덮인 들판처럼 펼쳐진다. 작가가 눈의 고장을 그윽하게 묘사하는 글을 읽다보면, 지금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착각에 창 밖을 내다보게 된다. 절묘하고 아찔하면서도 편안함을 동시에 들게 하는 회화를 감상한 듯한 기분이다. 무엇보다도 <설국>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즈음에는, 내리는 흰눈을 맞으며 홀로 먼길을 걸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마련인 애틋하면서도 아련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을 <설국>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내 눈이 맑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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