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뜰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4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집어들기 바로 전 읽었던 최인훈의 <광장>처럼 어쩌면 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혀 이루어질 수 없고 현실이 될 수 없는 꿈 속의 거닐며 나는 그것이 마치 현실인얀, 아니면 단지 꿈을 즐기며 깨어나지 않으려 현실의 두 눈을 질끈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어두운 밤 방 안에서 잠을 자며 빨려들어가는 그야말로 꿈이었으면 아무렇지도 않겠다. 그러나 나는 살아 꿈틀대면서, 입을 나불거리면서, 행위하면서 꿈을 꾸고있는 듯 하다. 한 밤의 꿈은 깨어나면 냉엄한 현실과 만나지만 행위하면서 꾸는 꿈은 객관적이고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더욱 은폐할 뿐이다.

문학을 공부하는 내가 이제야 작가 오정희를 알았고, 그의 책을 읽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일이다. 있을 수 없는 꿈, 있어서는 안 될 꿈. 그러나 그 꿈은 내게 현실이다. 참으로 '쪽팔리게' 이제야 오정희를 만났다.

아...
꿈에서 깨어야 하는가.
문학의 꿈에서 깨어야 하는가.

오정희 단편집 『유년의 뜰』은 마치 작가가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적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책의 단편 중에서 <別辭>만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주인공은 화자로써 모두 여성이라는 점, 주인공은 유년부터 시작해 50대의 주부까지 이어져 마치 성장일대기를 서술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그런 생각을 뒷밤침 해 준다.

이야기들의 분위기는 밝거나 명랑하지 않다. <유년의 뜰>에서의 '나'는 술집을 나가는 엄마와 성적관심으로 충만한 언니, 폭력을 일삼는 오빠로 구성된 가족 속에서 엄마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꺼내는 것이 조금씩 대법해 지는 예닐곱 살의 '나'이고, <중국인 거리>에서는 '양갈보가 될'테야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하는 친구를 둔 초등학생 '나'이다.

그 '나'는 <겨울 뜸부기>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오빠에게 월급을 가불하여 부쳐주는 성년이 되었고, <비어있는 들>에서는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유부녀가 되며, <꿈꾸는 새>에서의 무료한 '내'가 된다. 그리고 '나'는 <어둠의 집>에서 뻔히 알고 있는 거짓말을 하는 딸의 어머니이자 어둠의 집을 홀로 지키는 50대 외로운 여인이 된다.

이런 이야기의 『유년의 뜰』은 극적 긴장감과 갈등감은 없다. 일상적인 일과와 하루하루를 부드럽고 회화적인 문체로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런 일상성은 과거에 그 뿌리를 두는 것들인데, 그렇다고 과거가 현재의 상황을 중요하게 결정짓는 것으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현재에 일정한 무게와 중량감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년의 뜰』에서 기억되고 전개되는 과거는 절대로 밝은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극도의 암울함도 아니다. 다만 피해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만남들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흔히 좋았고 아름다운 것들만을 이야기하고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아픔은 있는 법. 단지 우리가 기억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현재의 나를 규정했던 과거. 역시 그런 과거를 돌이켜 되새기는 것은 기쁜일이 되지 못한다. 적어도 그 과거가 밝은 것이 아닐 때 말이다. 오정희 이 책은 그런 것들을 세심하게 우리에게 그려내고 있다. 물론 기쁘지는 않지만 돌아봄의 미덕을 안겨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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