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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그말리온의 꿈 - 문화마당 4-013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3
이윤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평점 :
'피그말리온은 훌륭한 조각가였다. 그는 살아오면서 여자의 결점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한평생 독신으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훌륭한 솜씨를 부려 상아의 입상을 조각하고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감히 산 여자 따위는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그 것을 바라보면서 피그말리온은 그 작품과 사랑에 빠졌다
아프로디테의 숭배자인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의 제전이 끝난 뒤, 자신의 상아처녀를 아내로 점지하여 달라고 빌었다. 아프로디테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피그말리온이 돌아와 그 조각에 키스하자 조각은 온기가 생겨났다. 아프로디테는 자기가 맺어준 이들의 결혼을 축복하였다. 이 결합으로부터 아들 파포스가 태어났는데,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파포스라는 마을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얼마전 대학원 입학을 위해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쓴 경험이 있다. 그 소설은 내가 지상의 빛을 받아 살아오면서 처음 쓴 소설이었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나는 마음 속의 커다란 부담감 때문에 쉽게 펜을 들 수가 없었다. 급기야는 원서 접수 하루 전날 밤을 새워서 날림으로 내 생에 첫 소설을 완성했다. 내가 쓴 소설 보다 내가 그 소설을 쓴 모습이 더욱 소설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또다른 하나의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 자체로 살아 꿈틀거리에하는 것이 글쓰는 사람의 자세이자 소망이다. 신화의 저 이야기처럼 글쓰는 사람에게는 피그말리온의 꿈이 있다. 아니 피그말리온의 꿈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첫 소설을 쓰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바룻밤이었다니... 나에겐 피그말리온의 꿈은 고사하고 기본적 자세조차 없었다. 구하는 자는 방황하고, 방황하는 자 얻는다고 한다. 나에겐 구하고자하는 욕망이 없었나보다. 하기에 얻는것도 없었다. 이제라도 피그말리온의 꿈을 그려본다.
이윤영의 『영화, 피그말리온의 꿈』은 우리 삶에 깊숙히 자리잡은 영화이야기다. 그 중에서도 자신의 '삶을 흔들리게 했던' 영화들에 대한 느낌을 미학전공자답게 아름답고 진솔하게, 그리고 '꿈'과 '성찰'을 담아 그려내고 있다.
자신이 만들어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피그말리온의 신화처럼 이윤영 씨가 사랑에 빠진 8편의 영화는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제7의 봉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 파스빈더의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스의 시선',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찬 안 훙의 '씨클로' 등이다.
이런 영화들에 대한 느낌과 사랑을 서술한 저자 이윤영은 영화 자체와 영화언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화에 자신의 삶과 경험을 결합시켜서 풀어낸다. 그래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영화평이며 마치 일기장에 적혀있는 비밀스런 글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의 글들이다.
좋은 영화는 물론이고 훌륭한 예술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무언가를 '걸리게'한다고 이윤영은 말한다. 그런 '걸림'은 내면의 깊은 울림이자 충격이며 하나의 반성과 성찰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마음을 '걸리게'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걸어야 한다. 삶을 걸어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걸리게' 할 수 있다. 저자 이윤영은 바로 그러한 '걸림'이 예술의 위상이자 정체성이라 말하고 있다.
대학 4학년 때 '삶을 걸지 않은 투쟁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라는 말을 하나의 신념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물론 지금도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삶의 하나의 좌표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현실의 내 삶은 '삶을 걸지 않은 투쟁'이라는 것이다.
내 삶을 걸고 타자의 마음을 걸리게 하는 글을 쓰고 싶다. 글만이 아니라 내 삶 자체가 그런 과정이었이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