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존 프럼 지음 / 래빗홀 / 2023년 6월
평점 :
존 프럼. 그는 누구인가
작가의 필명인 '존 프럼'은 화물신앙에서 숭배하는 가상의 인물에게서 따온 것이다. 존 프럼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 한국어로 검색하는 것보다 작가의 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생존의 공간이 서양인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의 침략을 쓸어버릴 빗자루(Broom) 같은 존재로 만들어 낸 신앙이 존 프럼이다.
'나에게 있어 존 프럼이란 이름은 세상에는 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면이 있다는 걸 상기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존 프럼이 멋진 저항의 상징이라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395쪽).'
'세상에는 늘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이면이 있다'는 이 책을 관통하는 문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서평이나 작가의 말을 먼저 읽는 사람들은 '스포일러'를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독특한 액션누아르하드SF"
SF라는 소재를 이용해 인간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을 주로 소프트 SF, 명확한 과학 이론이나 가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을 주로 하드 SF라고 한다. 하드 SF는 매니아층이 탄탄하지만, 그만큼 매니악하고 독자의 판단이 냉철한 분야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드SF 팬이라면, 이런 소개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하드 SF 단편집'이 맞다. 일곱 개의 수록작 중 처음과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면 명확한 과학 이론이나 가설이 작품의 바탕이다. 작품집의 문을 여는 <노아의 어머니들>은 소프트 SF라고 하기도 애매한, 발전한 기술 과학 기술이 조금 나오는데 작품의 메시지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시작이 이 책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있기에 탄탄한 팬층이 쌓이지 않은 작가의 SF 작품집으로는 탁월한 시작이다.
마지막 작품인 <콧수염 배관공을 위한 찬가>는 우주가 배경이기는 하나, 소프트 SF에 가까워 보인다. 재밌는 글에 적당히 희망적인 메시지와 결말까지. 전체적으로 열린 결말과 약간의 비극으로 끝나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가볍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어려운/우울한 책이었다'는 생각으로 책을 기억하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장 읽고 싶은 작품이 꼭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작품의 시작과 끝은 목차를 따라가길 추천한다.
일관성 있게 드러나는 작가 특유의 주제의식
"그 진실이 나를 구원하기를. 아니, 나를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닐까. 설령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167쪽)."
"일단 시나리오를 구매하면 그 시나리오가 진실이 될 거예요(나의 디지털 호스피스, 233쪽)."
지금 나의 세계는 진실이 맞는가? 진실은 무엇인가? 진실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 진실은 단일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나의 자유의지의 발현이 맞는가? 책 속 단편들을 읽다 보면 끊임없이 드는 생각이다. 소설집은 주로 하나의 주제 또는 흐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만큼 주제가 좁고, 주제의식이 강한 책은 처음이었다. 존 프럼은 책 전체에 걸쳐 '진실이 무엇인가'하는 철학적인 주제를 여러 번 다른 상황에서 생각하게 하는데 탁월하다. 철학적인 질문을 참신한 소재를 가진 SF에 엮어 보여주는 것에서 재미 이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다음 작품의 주제가 언뜻 예상 되면서도 새로운 길로 갈 것임을 알기에 계속 읽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작동 방식이 비슷한 테마파크
아쉬운 점은, 몇몇 작품에서 '진실' 이라는 '반전'을 주로 다른 사람이 대사로 설명해 준다. 단편소설이라는 분량의 한계 때문일 수 있으나, 반전이 급하게 알려져 아쉬웠다. 그리고 기록을 남기는, 또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이야기가 절반 이상을 차지해 소재의 참신함과 별개로 플롯이 반복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SF로 보는 철학
이 소설집은 'SF로 보는 철학'이다. 읽는 재미와 작가의 상상력을 엿보며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다. 필자가 서평에 적은 '진실'뿐만 아니라 '노동의 의미', '자유의지', '권태' 등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주제가 많기 때문에 철학, 인문학, SF 세 장르 중 하나 이상의 장르에 관심 있다면 모두 재미있게 읽을법한 소설집이다.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
끝으로, 새로운 소재가 많았던 하드SF소설집인데 비해 표지 디자인이 담백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나와 개인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든다. 뫼비우스의 띠를 중앙에 배치하고 작품에서 하나씩 키워드를 뽑아 띠를 돌아가며 그리거나, 제목을 시계방향을 돌리며 인쇄하거나, 지금보다 원색을 더 많이 사용했으면 더 많은 독자에게 눈에 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발표 당시 <테세우스의 배>였던 표제작의 이름을 <영원의 모양으로 찻잔을 돌리면>으로 변경한 선택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필자 역시 강렬한 제목에 이끌렸고 쉽게 잊히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서평단 활동으로 책을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