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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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원은 도시적이며 지적인 작가다. 그의 소설 속에는 뜨거운 욕망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소설적 기법을 모자이크처럼 입고 있다. 여기서 약간의 괴리가 있다. 그것은 현대인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작가의 시선일 수도 있다.

 

  첫 단편으로 실린 작품이자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하루」는 소시민들의 소소한 일상들이 얽히며 생기는 사건들을 보여준다. 몇 분, 몇 시간을 오가며 바뀌는 서술자는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사건들의 국면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애가 탄다. 이는 속임수 구성(반전 구성)이 넘쳐나던 시대에 레이먼드 카버가 제시한 소설적 작법이다. 독자에게는 미리 다 알려주고, 등장인물들은 혼란에 빠지는. 가령 이런 장면들.

 

  쌓인 눈을 발로 차며 걷던 소년이 걸음을 멈춘 것은 견인차 앞이었고, 시각은 오후 네 시 이십팔 분이었다. (…중략…) 견인차가 큰 길로 빠져나가자 소년의 뒤에서 두 대의 차량이 빠져나갔다. 앞선 차량은 견인차만큼이나 덩치가 큰 승합차였다. 호루라기를 불며 경비가 차량들을 인도했다. 소년은 차도로 엉금엉금 끼어드는 자동차를 바라보다 전봇대에 붙어 있는 견인대상차량 고지서를 보았다.

  소년은 고지서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천천히 읽으며 집을 향해 걸었다. 쌓여있는 눈을 발로 차면서.

 

  은행이 있는 건물의 후문을 여자가 빠져나온 시각은 오후 네 시 이십구 분이었다. 발목이 시큰거렸고, 또 한쪽 굽이 떨어져나가 걷기 힘들었지만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주차장이 있는 골목길을 향해 급히 돌았고, 그때 고지서를 읽으며 오던 소년과 부딪혔다.(…중략…)

  건물을 돌아 다시 주차장이 있는 골목 어귀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자신의 차가 분명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다시 전봇대에 기댄 채,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남편에게 전화했다. 발목이 시큰거렸고 오줌이 말라붙은 치마 안이 냉랭했다. 바람 때문인지, 자꾸만 달라붙는 눈송이 때문인지 여자는 추위를 느꼈고, 어깨가 저절로 떨렸다.

  ―여보, 차가 없어졌어.

  ―어디에 뒀는데?

  ―응? 여기. 은행 주차장 입구에.

  ―도난당한 거 아냐?

  도난이란 말이 여자에겐 순간 도망으로 들렸다. 여자는 도망? 도망이라니? 하고 중얼거렸다.

  ―자동차 문 확실히 잠근 거야? 당신 건망증 심하잖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여보. 차 안에 우리 아기가 있는데.

  여자는 남편에게 말하면서 불현듯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이 왜 그렇게 서둘렀는지, 그제야 알았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박성원 「하루」 中

 

  이처럼 독자는 신처럼 소설 속 세계를 관망하고 있지만, 개입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애가 타는 것이다. 이렇듯 일 분 차이로 갈려진 운명은 단 하루 사이에 엄청난 일들을 만들어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소시민의 관계에서, 마치 조감도처럼, 세계를 향해 줌아웃되는 시선으로 끝이난다. 즉 개인의 하루하루가 모여 세계의 하루를 이룬다는 뜻이 아닐까.

 

 

  이 책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중, 「얼룩」이라는 작품에선 또 기막힌 작법이 나온다.

 

  얼룩이 나타난 다음부터 여자는 아무 약이나 먹었다. 처방전도 필요 없었고, 약국에서 마치 쇼핑을 하듯이 약을 샀다. 여자에게 약의 효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알약의 색깔이 마음에 들거나 포장지가 예쁘면 아무 약이나 샀다. 그리고 울적해지면 닥치는 대로 약을 삼켰다. 언젠가는 연고의 색깔이 너무 좋아 핸드크림처럼 수시로 손과 팔에 바르기도 했다. 이처럼 많은 약을 먹였다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텐데, 의사들은 엉터리야. 약을 털어넣으며 여자는 생각했다.

 

―박성원 「얼룩」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여자는 얼룩이라는 환각을 본다. 여자의 아이가 죽고, 여자는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이 소설에서 아이의 죽음에 대한 내용은 많이 나오지 않는다. 여자의 아이가 죽은 뒤부터 여자는 시간개념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방금 위에서 인용한 내용. 이 두 문장만을 가지고도 독자들은 충분히 여자의 사연을 짐작할 수 있다. 짧고 간단한 설명으로 독자들의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기법은 정말 매혹적이다.

 

 

  이 소설집의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중반부와 후반부에 배치된 단편들, 「어느 맑은 가을 아침 갑자기」와 「분노와 복종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줘」, 그리고 「저녁의 아침」까지 연달아 세 편에서 '망원경을 든 소녀'라는 똑같은 인물이 나온다는 점이다. 어쩌면 다른 인물일 수도 있지만, 비슷한 인물이 연달아 등장하는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보면서 이것이 연작소설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마지막으로 실린 단편 「흔적」은 내 친구가 정말 좋아한 작품이다. 박성원의 작품에는 느낌 상일 수도 있지만, 구어체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구어체가 익숙하지 않다. 어쩌면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럴지 모른다. 이러한 작품들은 문체가 익숙해질 단 하나의 임팩트가 필요하다. 소설 속에 푹 빠져들면, 더 이상 문체는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생물 선생이다. 생물학만을 진리라고 믿는 주인공 때문에 이 작품에선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 생물학 용어와 지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이 캐릭터의 특성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현학적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이건 몸이 아니라 무덤이에요.

 

―박성원 「흔적」 中

 

  이 문장을 기점으로 소설에 빠져들어간다. 이 소설은 생물학만을 맹신하던 한 남자의 변화를 보여준다. 인생에서 1년 6개월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하루'와 마찬가지일 수도.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하루만에 인생을 모조리 살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이 하루에 집중한 것은 정말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강에 물이 흐른다면, 도로에는 사람이 흐른다. 물은 돌 속에 정박하지 않지만, 사람은 건물 속에 정박한다. 강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또 흘려보내지만, 도시는 닥치는 대로 집어먹는다.

  어째 훌륭한 소설이었다.

 

 

  누군가의 하루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세상을 모두 아는 것이다.

 

―박성원 「하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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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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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현대문학의 복잡한 화두를 보여준다. 여러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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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고 좋은 느낌으로 시집을 접해보고 싶다면, 추천드릴 목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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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지음 / 창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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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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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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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터 좀 빌립시다
이현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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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미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478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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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웠던 눈물에 대한 기억. 애인과 싸우고 비틀거리며 걷던 밤거리. 눈앞에서 흐적이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면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라는 문장이 맴돈다. 이건 내 문장이 아닌데, 내 것이 아닌데, 하면서도 내 삶에 파고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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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밝은 곳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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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월 1일자로 구입한 책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밝은 곳』이다. 민음사에서 쏜살문고 시리즈로 기획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민음사를 좋아하고, 헤밍웨이 또한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망설임 없이 책을 주문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하드보일드 문학의 거장이라 불린다. 그는 소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직전에 읽은 책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라는 소설인데, 어쩌다보니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소설들을 읽고 있네. 어쨌든, 이번 쏜살문고에서 출판한 헤밍웨이의 단편들은 모두 수작이라 불리울 만큼 뛰어난 작품들이다.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잠들고 싶어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난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군."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이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음도 자신감도 아주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만의 문제는 아니야.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어쩐지 망설이게 돼.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밝은 곳」 부분

 

  「깨끗하고 밝은 곳」은 이 책의 표제작이자 첫 번째에 실린 작품이다. 아주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조이스는 이 작품을 두고 "이제까지 쓰인 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이다"라고 평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준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에서 최소한의 정보를 이용해 독자들에게서 최대의 상상력과 감정들을 이끌어낸다.

  이 작품에선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충돌되는 데에 매력적인 맛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부분은 내가 제일 인상 깊게 본 장면인데, 나이 많은 웨이터의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서점이나 카페 등을 차리게 된다면 저런 마음으로 운영하지 않을까 하는.

 

 

  이번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구면이었던 작품은 두 번째로 실린 단편「살인자들」이었다. 고등학생 때, 집에 우연히 중고로 들어온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 같은 경우에는 딱 한 장면을 자르기 힘들었다. 모든 문장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알듯말듯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앞서 얘기한 「깨끗하고 밝은 곳」보다 훨씬 독자에게 맡겨둔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크레브스는 거짓이나 과장으로 만들어낸 경험에 대해 욕지기를 느꼈다. 어쩌다 댄스파티에서 정말 군대에 갔던 전우를 만나 탈의실에서 몇 분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때면 그는 다른 전우들과 함께 있는 옛 군인이라는 편안한 태도에 빠져들었다. 즉 그는 넌더리가 날 정도로 끔찍하게 항상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병사의 집」 부분

 

  "무슨 일을 할 건지 이제 결심이 섰니, 해럴드?" 어머니가 안경을 벗으면서 말했다.

  "아뇨." 크레브스가 대답했다.

  "이젠 그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니?" 어머니가 이 말을 비꼬듯이 한 것은 아니었다.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직 생각해본 일 없어요." 크래브스가 대답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알맞은 일거리를 주신단다." 어머니가 말을 이어 나갔다. "하느님의 왕국에는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

  "난 하느님의 왕국에 살고 있지 않은 걸요." 크레브스가 말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병사의 집」 부분

 

 「병사의 집」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고향으로 귀환한 청년 크레브스의 이야기이다. 헤밍웨이는 전쟁과 관련한 장편소설을 많이 썼지만, 이 작품도 마찬가지로 전후의 허무함과 망가져버린 전쟁영웅의 일상들을 보여주고 있다. 헤밍웨이 자신 또한 여러 번 전쟁에 참전한 내력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들이 가져다 주는 심리 묘사가 아마 첫 번째에 인용한 내용이지 싶다. 많은 경험들은 작가에게 도움이 되지만, 경험들을 글로 표현하는 건 작가의 역량이다. 그럴 때 경험이 도움이 되는 거지. 헤밍웨이는 삶에 밀접하게 글을 썼다. 살갗처럼 가까운 글들. 이 「병사의 집」이 그런 작품이 되었던 느낌이다.

  전쟁에 참전하여 살아돌아온, 전쟁 중엔 아주 용맹한 전사였지만, 돌아와선 자꾸 편안한 삶을 향해 도망치게 되는 한 청년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어떤 면모를 거울처럼 비춰줄 것이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6000미터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한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서쪽 봉우리 가까이에는 바짝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서두

 

  그는 확실히 파악한 뒤 훌륭하게 쓰고 싶은 생각에 안 쓰고 아껴 두었던 작품들을 이제는 영원히 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써 보려다가 실패하는 일도 없겠지. 어쩌면 이제는 그 작품들을 끝내 못 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고 미처 시작하지도 못한 것이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부분

 

  매우 짧은 분량으로 써진 앞선 세 작품과 달리, 남은 두 작품은 꽤 넉넉한 분량을 가지고 있었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 작품에 비해). 「킬리만자로의 눈」은 읽는 데에 오래 걸렸지만, 「깨끗하고 밝은 곳」과 더불어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이며, 애인(혹은 아내)과 함께 여행을 갔다가 다쳐 죽을 병에 걸리게 된다. 작품 중간중간에 보면 글씨체를 바꿔 전개되는 부분이 있는데, 처음에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읽다보니 그것은 먼 과거를 회고하는 느낌으로 읽혔다.

  이 작품이 내게 가장 의미있게 다가온 이유는,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면서 시와 소설, 희곡 등을 공부하면서 보다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죽기 전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다 못 쓰게 될까봐서이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다 썼는데도 살아있을까봐서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에는, 죽기 직전에 작가로서 못 쓴 작품들에 대한 회한이 드문드문 보이는데, 그게 너무 뼈저리게 다가왔다. 게으름, 혹은 머뭇거림이 우리의 성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는 죽음이라는 실감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와 상관없이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저 거지 같은 녀석 꼴 좀 보게나, 하고 윌슨은 생각했다. 녀석들 중에는 오랫동안 어린애로 남아 있는 놈도 있지, 하고 윌슨은 생각했다. 때로는 죽을 때까지 평생 어린애 티를 벗지 못하는 놈도 있거든. 나이 오십이 되었는데도 어른 가면을 쓴 채 여전이 어린 애로 남아있는 사람들 말이야. 저 위대한 미국의 애늙은이들. 참말로 묘한 족속들이야. 그러나 지금 이 매코머라는 사내는 마음에 드는 것 같군. 정말 이상한 친구야. 어쩌면 이제 여편네의 서방질도 끝이 나겠어. 그래, 그래야지. 하여튼 정말 잘된 일이야. 정말 잘된 일이라고. 저 거지 같은 녀석은 평생 겁을 먹고 살았을 거야.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이제 모두 끝났군. 물소를 상대로는 겁을 먹을 여유도 없었던 거야.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 부분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는 「킬리만자로의 눈」과 비슷한 느낌의 풍경과 느낌이 연출되지만, 놀랍도록 훌륭한 존재론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에는 겁쟁이 매코머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전문수렵꾼 윌슨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매코머는 일생 중 유일하게 온전한 '나'로서의 실존하던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헤밍웨이가 제목에도 썼듯이, 어떠한 겁도 먹지 않고 용기 있게 살아간 그 짧은 순간, 매코머는 행복했을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진정한 나의 생을 산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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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7-25 0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죽기 전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다 못 쓰게 될까봐서이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다 썼는데도 살아있을까봐서이다.‘란 생각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최근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거든요. 제가 쓸 글이 더 이상 없을까봐 뭐 이런^^; 앵무새처럼 딴 사람이 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얇아서 가볍게 집어들었다가 <프랜시스~>직전까지 읽었는데, 작가와의 접점을 찾지 못해 답답했거든요. 다른 분들의 리뷰를 훑어보다 이 공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설서를 읽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감사드려요.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봐야겠군요.^^

윤탐 2017-07-29 21:53   좋아요 1 | URL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쓰기란 참 어려운 작업이죠. 남과는 다른 나만의 방식을 찾아가며 써야하니까요. 더구나 책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선 자신만의 내면을 지켜나가며 써야 하죠. 이렇게 또 글 쓰기를 좋아하는 분을 만나게 되어 마음이 기쁩니다 :)

작품에 대한 해설서를 읽은 것 같다니, 과찬이세요 ㅠㅠ 워낙 헤밍웨이를 좋아하다보니 글이 길어진 것 같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프랜시스 매코머의 짧지만 행복한 생애」까지 꼭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헤밍웨이가 생각하는 인생의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 되어서요. 보다 작가를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조만간 다시 읽은 책들에 대한 리뷰들을 하나하나 쓸 참이었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