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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1
보들레르 지음, 김붕구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보들레르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 「알바트로스」를 접하면서였다. "창공의 왕자들"이 지상에 붙잡히자 그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시인도 폭풍 속을 드나들고 사수를 비웃는/ 이 구름 위의 왕자 같아라./ 야유의 소용돌이 속에 지상에 유배되니/ 그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방해하네."라고 말한다. 알바트로스라는 새도 잘 모르면서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모 소설가의 소설에 인용된 그의 이름과 작품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우연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그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읽게 되면서 차츰 내 머릿속에 그의 상을 가다듬은 것 같다.
언젠가 그의 시집을 꼭 읽어보리라 했었는데, 마침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그의 책을 싼 값에 만나게 되었다. 책이 많이 낡았으나 꼭 사모으고 싶었던 민음사 세계시인선이기도 했고, 보들레르이기도 해서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옆에 세계시인선 테니슨의 시집도 있었으니 두 권 다 내 손에 들어왔다. 잡담이 길었는데, 그럼 이제 제대로 리뷰.
민음사 세계시인선은 한 페이지에는 한글로 번역된 시가, 다른 한 페이지에는 원어로 적힌 시가 실려있다. 원본과 비교해볼 수 있다는데, 난 외국어는 젬병이라. 보들레르의 『악의 꽃』 시선집이라고 할 수 있는 민음사 세계시인선 판은 총 20편의 시가 실려있다. 번역이 되어 있으나 많이 어려웠던 이 시집에서 몇 편만 골라 소개해보겠다.
허나 승냥이, 표범, 암사냥개,
원숭이, 독섬섬이, 독수리, 뱀 따위,
우리들의 악덕의 더러운 동물원에서,
짖어대고, 노효(努哮)하고, 으르릉대고 기어가는 괴물들,
그중에도 더욱 추악 간사하고 치사한 놈이 있어!
놈은 큰 몸짓도 고함도 없지만,
기꺼이 대지를 부숴 조각을 내고
하품하며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니,
그놈이 바로 <권태>!――뜻없이 눈물 고인
눈으로, 놈은 담뱃대 물고 교수대를 꿈꾸지.
그대는 알리, 독자여, 이 까다로운 괴물을
――위선의 독자여, ――내 동류여, ――내 형제여!
―샤를 보들레르 「독자에게」 中
보들레르는 이 시에서 말한 바와 같이 "권태"에 대해 항상 경계하고 적대심을 가진다. 이후의 시에서도 그러한 태도는 일관성을 가진다. 보들레르는 병적이고 본능적인 것을 파헤쳐 시의 본질에 가 닿는다.
보들레르의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의 시 곳곳에서 여성은 주로 매춘부의 형상을 띠거나 탐욕적이고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오늘 저녁 무엇을」 같은 시편에서는 아름다운 천사같이 등장한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가 극찬하는 환상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름다워, 명하노니, 날 위해 오직 <미>만을 사랑하라, 나는 수호천사요, 시신이자, 마돈나이니라!"
이 외에도, 극작품으로 개작할 계획에 열중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는 「살인자의 술」도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한 남자의 독백 같은 이 작품은, 배우를 상상하고 읽는 재미도 있다. 이대로 짧은 무대를 완성할 수 있는 놀라운 시다.
「성베드로의 부인」은 신에 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항적인 화자의 입을 거쳐 예수에게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는 시구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결코 쉬운 시집은 아니나, 맥락을 잘 짚어가며 읽으면 어떤 대단한 느낌이 온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말 그대로 '악의 꽃'이지 '악한 꽃'이 아니다. 불교적 상징을 가진, 진흙속에 피어난 연꽃보다 더욱 강렬하고 화려한 꽃이 문학사에 피어오른 것이다. 문학을 악에서 길어올렸다는 점에 주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