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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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를. 싫어한다, 여자아이는. 자신이 열여덟 살이라는 걸. 지방 소도시 특유의 문화 속을 걷는다는 사실을. 혐오라는 단어를 내뱉지 않아도 여자아이가 경험하는 감정은 그 단어를 닮았다.

버스를 타는 일은 고되다. 등하굣길 언덕 높은 곳으로 오르는 만원버스 안. 높은 습도, 더부룩한 냄새,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 없이 가득 끼어 있는 사람들. 여자아이는 밤늦게 수업과 야간 자습을 마친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여자아이가 살던 주택가로 내려가기까지 이어지는 몇 블록의 번화한 길. 술집이 빼곡히 들어선 거리, 번쩍이는 네온 간판들, 삐걱삐걱 비틀거리는 어른들이 불콰한 눈길로 여자아이를 쳐다본다.

여자아이는 마치 교복이 무기라도 된다는 듯, 가방 어깨끈을 꼭 쥐고 결연한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며 속도를 내어 힘차게 걸어내려간다. 일부러 걸어와 부딪치며 신체 어딘가를 스치거나 아프게 치고 가는 미친 어른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얼어붙은 여자’ 이후 1년 여만에 다시 마주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은 계속 어떤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주체가 되고자 했으나 주체가 되지 못했던 기억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도, 벗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어떤 순간의 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 기억들은 잘라낸 단면이기도 하고, 잊고 있던 장면 너머를 새롭게 이어가기도 하며 고스란히 되살아나 삐죽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상하게 자꾸 떠오르는 장면 하나. 노래방에 간 여자아이를 본다. “예쁘지 않아 나를 떠나간 거니”라는 노래가사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또 한 명의 여자아이와 고등학교 연극반 선배의 옆모습을 관찰하는 여자아이. 언니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떤 소외의 순간들을 경험하며 잘못 없음을 항변하기보다 외형적으로, 내면적으로 달라지고 싶어하는 감정과 필사의 노력을 지속하던 어느 시간들. 현격히 기울어진 관계에서 객체화되고 공개적으로 버림받고 놀림거리로 전락하면서도 자기검열에 빠지는 어떤 자세들. 지금에야 그런 객체화된 감정과 자기검열이 관계와 사랑과 성장 서사에서 사라지길 바라지만. 그때 그 시간을 살던 여자아이들은.

1958부터 1960까지. 시대보다 중요한 건 시간일까. 붉은 표지의 수첩에 적히던 일면 불가해하고 불투명하게 얼룩진 서사의 그늘이 자기연민의 언어가 아닌, 냉정하면서도 불길처럼 뜨거운 객관화의 시선으로 쓰여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얼음처럼 불타게 한다. 깊은 심연의 바다 밑에서 홀로 빛나며 불타오르는 메테인 하이드레이트의 존재처럼.

“고통스러운 기억을 위로하고, 같은 시기에 거의 비슷한 일을 겪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이 지닌 고유성과 고독을 산산조각 내러 상상력이 찾아올 때 느끼는 이 회고적 위안의 기이한 달콤함.” _ p.127

“경험하는 순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 모든 문장, 모든 단언에 구멍을 뚫어야만 하는 현재의 불투명함.” _ p.161

“글쓰기의 가능성이 많아지는 건 우리가 경험하는 그 순간, 경험하는 것의 의미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_ p.211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 _ p.131

+) 한참 시간이 흘러간 이후에도 결코 지워내거나 비워낼 수 없던 기억의 편린들을 멀찍이 관조하는 시선으로 담담하고도 날카롭게 적어내는 노작가의 손길을 생각한다. 또한 이를 정성껏 풀어내는 젊은 한국인 번역가이자 소설가의 손길을 동시에 느낀다. 독자 입장에서 마치 작가와 번역가가 부지런히 협업하며 마음을 담아낸 것 같은 한 권의 책을 만나는 일은 ‘살아있음’을 사랑하게 만드는 기쁨이다.

책에 담긴 관찰자적 자아의 시선과 손길이 생생하고 아프게 독자의 심장을 파고드는 작고 붉은 책 한 권. 잊었다고 여겼던 혹은 사무치게 잊고 싶었던, 결코 잊지 못하고 박혀 있던 어느 순간의 서사들이 또 다른 독자들의 심장에도 깊게 스며들어 뜨겁게 흘러내리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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