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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지 ㅣ 창비시선 452
정현우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슬픔을 머금은 큰 소년의 눈동자로 선과 악의 사이, 그 기로에 놓인 천사 또는 인간의 목소리를 담은 시집.
S#1. 무대, 저녁
-제1부 ▪️모든 슬픔을 한꺼번에 울 수는 없나
소년 성가대 합창단이 정갈한 흰 옷을 입고 줄지어 서서 노래를 한다. 맑은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한 어린 천사가 공중을 맴돈다. 누구도 보지 못한다. 노래가 절정을 향할 무렵, 소년 하나가 대열을 흐트러뜨리며 무대를 뛰쳐나간다. 마치 공중으로 튀어오르듯, 부서진 날개로 하늘을 날아오르고 싶다는 듯. 소리를 잊은 소년과 하늘을 잃은 천사가 서로를 마주 본다. 그렇게 소년은 태어난다.
S#2. 소년의 방, 깊은 밤
-제2부 ▪️시간과 그늘 사이 턱을 괴고
소년은 자웅동체의 달팽이를 사육한다. 귓바퀴를 닮은 물음표를 갉아먹는 달팽이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구분 사이에서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는 소년을 술래로 만든다. 언젠가 어느 날, 얼굴을 잊은 친구가 나지막한 옆모습으로 했던 말, “나는 태어날 때 이미 세례를 받아서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 그 때 그 소녀의 목소리를 귓바퀴에 다시 감돌게 하는 시들. 소년도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신과 엄마와 천사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신에게 들키기 위해 / 흰 천을 뒤집어쓰고 기도하는(<오르톨랑> p.67)’ 인간의 모습으로 ‘주어진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더 많은 귀를 잘라야 할 것(<묘묘> p.59)’이라 소리치며 소용돌이치는 소년의 밤이 깊어간다.
S#3. 소년의 방, 새벽
-제3부 ▪️소년과 물보라
성가대에서 천사를 따라 뛰쳐나온 소년은 밤새 잠을 이룰 수 없다.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영원한 소년의 목소리로 카스트라토가 되어야만 할까. 뒤척이는 새벽, 소년의 꿈에선 ‘젖은 음표들이 입속에 우글거리’고 ‘아가미를 자른 인어가’ 소년을 ‘삼킨다(<인면어> p.74)’. 거세를 거부하는 소년의 꿈은 온통 여성과 남성 그 사이를 오가며 ‘굵은 눈발이 숲을 흩뜨(<인어가 우는 숲> p.94)’리는 죽음과 사랑과 신을 노래한다. 여전한 소년의 미성으로.
S#4. 창가, 여명
-제4부 ▪️여름의 캐럴
“숨이 끊겨도 사흘 동안 살아 있는 것은 귀라는데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아버지의 귀에 대고’ 끝없이 묻고 싶은 마음과 ‘붉은 나의 두 귀를 / 감싸던 아버지의 손(<겨울 귀> p.109)’ 사이에서 소년의 오늘은 계속 질문을 머금는다.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사람들은 별자리로 떠돌다 목을 맨 유성으로 떨어’지고, ‘다시 꿈을 꾸어도 되느냐고’ ‘입술을 글썽이던 삼일(<소멸하는 밤> p.119)’이 이내 흘러가는, 아주 여리고 희미한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아직은 어두운 시간. ‘가지를 쳐내도 징그럽게 자라나’고, ‘소매에 넣으면 길어진 나의 팔은 쑥쑥 자라 입을 수 없는 옷들만 수북이 쌓’이는 공간에서 ‘시옷 모양의 옷(<옷의 나라> p.122)’으로 죽음과 탄생 사이를 넘어 구원받고 싶은 슬픔이 여전히 소매를 적신다.
🔖 시집이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의 흐름이 비슷한 결로 이어지고 있어 계속 몽환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집 전체에서 흐르는 이미지가 옵티미즘(optimism)적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소년이 살고 있는 인간의 세상이 슬픔의 보라빛으로 물든 느낌이지만, 소년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인간의 세계는 결국 긍정으로 흘러갈 것만 같아요. 어둠의 끝에 당도한 하늘이 결코 어둡지 않고, 그 곁에 마치 수호신과도 같은 누군가들의 축복이 ‘목화가 피어 울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귓가에 목소리를 건네는 소년에게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무릎과 발목과 손바닥의 힘을 북돋워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