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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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해인 마을은 이제 지도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장소, 사라져버린 장소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이라는 하나의 장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에 대한 창작과 상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지만, 시작부터 소멸되어버린, 그래서 막연하고도 먼 누군가들을 생각하게 했다.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먼 옛날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삶, 아이들은 기회만 된다면 마을을 떠나고 싶다. 민영은 어떻게든 약간의 재주를 더 키워 멀리 떠나고 싶은 욕구를 대놓고 드러내고, 진영은 마치 숨겨둔 발톱을 살짝 내비치는 듯이 고개를 든다. 마을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은 소녀들이 함께 글을 써서 누가 백일장에 나갈 것인가를 겨루기로 한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은 의지로.

소녀들이 써내려가는 글들이 열린 구조로 중첩되어 흘러가는 콜라주 형태의 소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원하는 마음”(p.137)들이 흩어지다가 모이면서 연결된다. 이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이어지는 여자들의 불안과 고통과 슬픔의 기록들이다. 어느 순간에는 이 이야기가 소설인가 현실인가 겹쳐지는 듯 사라지는 듯 읽힐 때도 있었다. 갈망하며 손을 뻗고 자기 목소리를 활자에 싣는 소녀들의 마음이 배어드는 듯이.

아르테 작은 책 시리즈 8번째 소설, 손바닥만큼 작고 얇은 책이라 받자마자 부담 없이 넘겼는데 순식간에 몰입해서 훅 읽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음 날 찬찬히 한 번 더 읽고. 작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짧지만 대충 흘려보낼 수 없는 내밀하면서도 아픈 속마음의 기록들이 소녀들의 펜 끝에서 살아난다. 두세 번 반복해서 읽기에도 좋은 분량이어서 이런 판형의 작은 책의 시도도 참 좋았다. 다만, <화이트 호스>에 이어 <다정한 유전>을 작은 책으로 읽고 나니 좀 더 긴 서사에 대한 목마름도 생겨나서 강화길 작가의 다음 작품이 더 목마르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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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유영의 낭독으로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도 함께 나왔다고 해요. 팟빵과 네이버 오디오클립, 밀리의 서재 및 인터넷서점에서 함께 구입할 수 있는 패키지가 있어요. (선착순 친필사인본도!) 오디오북 트레일러를 보니 배우의 목소리와 글의 분위기가 잘 어울려서 조만간 들어봐야겠어요!

아르테 <다정한 유전> 서평단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런데 안 되었어도 구입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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