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눈떠야 할까 - 신앙을 축제로 이끄는 열 여섯 마당 밀알 아카데미 26
김신일.민영진.이만열 외 지음 / 신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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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보지 못하나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보는 것에도 '참'과 '거짓'이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보아야 참으로 알고 참으로 믿음에 나가는데, 잘못 보니까 잘못 알고 믿음 생활도 잘못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 세상과 진리에 대하여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 여는 글 중에서 (8-9쪽) -


무엇을 보고 사느냐, 그것은 지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는 것에 따라 삶의 선택도 달라지고, 삶의 방식과 모습도 달라진다. 무엇을 보느냐는 단순히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보는 이의 인격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들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품는 사람들이며, 그 인격으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을 품는 것까지 나아가기가 참으로 요원하게 보인다. 물론 고된 현실 때문이다. 엉겅퀴가 가득한 현실을 헤치고 살아가야 하는 것 자체가 온갖 상처를 뒤집어 쓰게 만든다. 그러나 그 현실이 눈을 가린다. 이것이 더 큰 문제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어떻게든 고된 현실을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에 갇혀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에게 갇혀버린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어떠할까. 그 곳이 어둠이고, 지옥이 아닐까. 이것이 역설이다.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하나, 눈이 갇혀버릴 수록, 자기 자신에게 빠져버릴 수록, 살아가기는 더더욱 힘겨워 지는 현실이다. 


이런 삶 속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숨을 고르고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보라고 말한다. 눈을 돌려서 세상을 보고, 진리를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의 숨통이 트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 작은 걸음들이 모아진다면, 어느 순간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세상 속에 오신 그리스도를, 이웃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를 더욱 온전히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품게 되고, 고된 현실을 신앙의 축제자리로 만들어 내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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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의 거짓말
김형국 지음 / 포이에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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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원과 믿음에 대한 거짓말(1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거짓말(2부), 교회에 대한 거짓말(3부).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다가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모습이 보이고, 그로 인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이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인된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모습...이 하나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들(9)’이 진리를 따르는 모습을 가리고 대신하고 있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교회안의 거짓말들이다.

2. 거짓말들의 내용을 보면 순간 멈칫하게 된다. 그야말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면서 말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 속에 놓여있는 거짓을 파헤치며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은 복음, 진리의 복된 소식이 무엇인지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미처 못 보았던 것들,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세세히 되짚으며 믿음의 초석을 단단히 다지고, 믿음의 삶을 제대로 온전히 살게 하는 견실한 탑을 쌓게 돕는다. 이렇게 단단하게 다져진 내용들이 얄팍해서 흩날리는 것만 같은 내 속을 거세게 흔는다. 복음의 초석을 더욱 단단히 다져가야겠다.

3. 교회안의 거짓말이 교회안의 참말로 고백되고 살아나는 모습을 그려놓은 마지막 말이 깊은 여운을 가져다 준다. 들어도 들어도 참 좋다. 먼저 교회의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일단 믿어보세요. 믿고 기도하면 응답받아요. 구원의 확신있으세요? 믿음은 좋은데, 왜 저래? 제가 아직 덜 죽어서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지상의 교회는 어차피 완전하지 않아. 사람을 왜 봐? 하나님을 보고 다녀야지. 그 교회 부흥하네. 난 평신도니까.’ 온전히 다시 살아나야 할 교회안의 참말은 이것이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 자신을 얻는 복을 받아요. 건강한 회의가 진정한 믿음을 가져와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면 응답받아요.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앞으로 받을 구원을 향해 자라가고 있어요. 믿음이 좋은만큼 예수님 닮아가요.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정체감으로 살아요. 육신의 약함을 성령의 힘으로 이겨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 싶어요. 교회는 완전하지 않지만 진실할 수 있어요. 변화된 사람들을 보고 교회를 찾게 되지요. 우리는 교회의 진정한 부흥을 꿈꿔요. 평신도는 없어요. 우리 모두가 성도일 뿐!(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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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이 좋아 - 고통 속에 부르는 아가(雅歌)
김병년 지음 / IVP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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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울었다. 셋째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어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8년 넘도록 여전히 누워만 계시는 사모님의 모습이 아파서 울었고, 여전히 변함없이 사모님을 돌보며 하나님과 씨름하는 목사님의 애달픈 삶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고통과 아픔을 끌어안고 절망과 소망 사이를 거닐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피워내는 거룩한 모습...에 내 모습이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울었다. 읽는 내내 울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2. 난 당신이 좋아. 묻는 말에 늘 이렇게 답해서 나를 갑갑하게 했던 아내. 그러나 그것이 아내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지금,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현실이 내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아내가 내게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일보다 아내를 사랑하는 다정다감한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우리 둘이 맺은 사랑의 열매인 아이들을 부드럽게 인내하며 가르치는 아빠가 되라고, 성격이 다르고 믿음의 분량이 다른 부모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라고, 무엇보다 아파 울고 있는 성도들에게 밥 한 그릇 더 먹이고, 극단적인 양극화 속에서 신음하는 가난한 자들을 먹이고, 풍요 속에서도 자유를 맛보지 못한 이들에게 단순한 삶의 신비를 가르치라고. 아파 누운 아내의 사랑은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자로 자라가도록 나를 일깨우고 있다. (191~192쪽)

3. 메마른 나의 마음을 확인한다. 사랑하는 자로 자라가기가 쉽기 않다. 아픔과 슬픔을 못 보고, 보듬고 품어내지 못하는 속 좁은 내 마음이 초라해진다. 메마르고 좁아져서 혹시나 가시가 되는 것은 아닌지, 가시로 사는 건 아닌지 두렵다. 그래도 다행이다. 눈물이 남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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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이혼 믿음의 글들 20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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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의 해설 부분이다. “근본적으로 루이스가 주장하는 죄의 모습은 자기집착입니다. 이러한 자기집착은 사후에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 속에 판치는 타락의 그림자입니다. 루이스 생각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집착을 하고 있음에도 자기 안에 완전히 매몰되어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될 수 없는... 것은 ‘육신’이라는 가시적 존재틀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할 수 없이 남들과 부딪히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언젠가 육신을 벗게 될 때 자기집착은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게 될 터인데, 그것이 곧 지옥의 모습이 되리라는게 루이스의 추측입니다. 끝없는 자기집착으로 인해 블랙홀처럼 하도 안으로만 빨려 들어가다 보니 결국 빗물질적인 유령의 세계인 지옥이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돌멩이만한 크기도 안 될 거라는 상상은 또 얼마나 흥미로운지요! 루이스가 생각하는 사후, 즉 개인의 종말은 이 세상에서 이미 겪고 있던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더 뚜렷하게 구분되는 현장을 말합니다. 멸망을 자원하는 유령에게는 천국이 제시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거절하게 될 것이며, 그런 논리에서 지옥의 문은 밖에서 걸어잠근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잠겨 있다는 재미있고 의미심장한 견해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180~181)”

2. 복음은 좋은 소식이다. 기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패배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전하는 소식이다. 현실은 전혀 그런것 같지 않아 보여서 절망스럽기도 하다. 거대하고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비롯 개개인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악의 문제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낌새조차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누룩과 같고 겨자씨와 같아서 이미 시작되어 퍼져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믿음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는 선포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막 1:15)”

3. 믿음은 삶의 자리를 바꾸어 놓는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거나, 살지 않거나. 이것은 선택이다.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의 나라를 살지 않는 곳, 그곳이 다름 아닌 지옥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옥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면, 지옥도 이미 존재한다. 다만 그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C. S. 루이스의 이야기는 이러한 모습을 그려준다. 이 땅에서 이미 겪고 있던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이 더 뚜렷하게 구분되는 현장말이다. 그리고 그 곳은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한 곳이 될 것이다.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다 타게 되어 있으니 걱정 말게.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인간들과, 하나님의 입에서 끝내 ‘그래, 네 뜻대로 되게 해주마’라는 말을 듣고야 마는 인간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전부 자기가 선택해서 거기 있게 된 걸세.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게 없다면 지옥도 없을 게야. (95)

그 선택이 두렵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것 같아 두렵다.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보다 고집스럽게, 참으로 고집스럽게 블랙홀같은 자기 자신 속으로만 함몰되어 들어가는 것 같아 두렵다.

버림받은 영혼들의 선택은 ‘천국에서 섬기느니 차라리 지옥에서 지배하는 편이 낫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네. 사람들이 비참한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지키려고 고집하는 것들이 늘 있게 마련이지. 사람들은 기븜보다 더 좋아하는 것, 즉 실재보다 더 좋아하는 것을 늘 갖고 있다네.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해하느니 차라리 저녁도 못 먹고 놀지도 못하는 편을 택하는 버릇없는 아이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흔히 아이들의 그런 행동을 ‘심통 부른다’고들 하지. 하지만 어른이 그런 짓을 할 때는 수백 가지 근사한 이름들을 붙여 놓는다네.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든지 코리올라누스의 위대함이라든지, 복수, 명예 훼손, 자중심, 비극적 위대함, 정당한 자존심 따위의 이름들 말일세. (91) .... 자네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곳의 선택에는 수없이 많은 형태가 있다네. (92)

성경에서 외치는 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나는 어떠할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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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바울의 복음을 말하다
톰 라이트 지음, 최현만 옮김 / 에클레시아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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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즐겁다. 작고 작았던 눈이 열리고, 새로운 앎이 마음을 사로잡아, 내 삶을 두드릴 때의 설레임은 다시 나로 하여금 읽고 배우는 자리로 인도한다. 톰 라이트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를 그 속으로 이끌어 준다. 그러나 아쉽다. 내 이야기로 말하지 못해서.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족함이 나의 빈 자리를 자극한...다. 천천히 더 걸어볼 셈이다.

2.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바울이 뿌리내린 유대교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것의 중심은 ‘유일신론’, ‘선민의식’, ‘종말론’에 있다. ‘이 세상에는 한 하나님, 단 하나의 참 하나님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나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 미래는 그렇게 멀지 않았으며 그 종말의 때에 참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고 악을 물리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다소의 사울은 이 모든 내용들을 믿었다.’(44)

3. 바울은 유대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울은 유대교의 오랜 이야기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 이야기의 절정과 성취에 이르렀다고 믿었다. (58) 여기서 바울의 ‘복음’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방법, 어떤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취하고 우리는 그의 의를 취하는 신학 메커니즘, 또 다른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예수가 나의 개인적인 구원자가 되는 방법, 또 다른 말로는 나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나의 삶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60)과 구별된다.

4.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이란 개인적이고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한 개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예수에 대한 사중적인 선포가 바울이 이해한 복음이었다.(94)

1)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꼭 집어 이야기하자면 그의 십자가 안에서, 죄와 사망을 포함한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2) 예수의 부활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유배 생활이 끝나며, 모든 세계가 유일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날이 시작되었다. 3)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메시아, 즉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이었다. 4) 따라서 예수는 주이시다. 그는 이 세상의 참 왕이시며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94)

이 메시지는 하나님에 대한 극적이고 이중적인 선포이기도 하다.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며, 이교의 신적인 존재들은 그저 우상들에 불과하다.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제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95)

5. ‘바울은 유대교 유일신론의 중심에, 즉 유일하신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복수성이 있으며 상호작용하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고 주장했다.’ (115) ‘이것은 삼신론이 아니다. 유대교 유일신론에는 오직 한 하나님만이 존재한다. 또한 그것은 단연코 범신론도 아니다. 이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일치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이신론도 아니다. 이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소원하지도 격리되어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 세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그것은 결단코 양태론도 아니다. 이 셋은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데 그 중간항은 사람 예수이다. 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일 수 있는지에 관해 수수께끼를 풀고 있었던 게 아니다. 바울에게는 그 모든 사실 그대로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였다.’ (119)

6. 바울은 이 복음을 이방세계에 전했다. 이것은 이교도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었다. 이교가 모방하고 있는 것들의 진정한 실체가 이 ‘복음’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 이 ‘복음’은 이스라엘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하나님의 의’가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톰 라이트는 언약, 법정, 종말론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설명한다. 여기서 ‘칭의’가 새롭게 정의된다. (이 부분은 다소 어려웠다. 그리고 논쟁적이다. 톰 라이트는 <톰라이트 : 칭의를 말하다>, 에클레시아북스에서 이 논의를 집중적으로 전개한다.) 톰 라이트는 칭의는 ‘개인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 공동체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특별히 그 내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때인 종말론적 사건에 앞선 현재 시기에, 어떻게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라고 말한다. (198)

7.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새로워진 하나님의 인류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것은 신앙없는 이스라엘이 달성하는데 실패한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인류가 성취하게 된 것, 또한 성취해 나가야 할 것이었다. 새로워진 인류의 중심은 예배다. 새로워진 인류의 목표는 부활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변화는 거룩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일치는 사랑이다. 새로워진 인류의 열심은 선교다.

8. 바울의 ‘복음’은 예수가 주라는, 즉 그가 이 세상의 주시며, 이 우주의 주시며, 이 땅의 주시라는 선언이다. (257) 이 말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사신 예수의 주권이라는 권세의 도마 위에서 판단 받지 않을 삶의 영역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예수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소환을 거절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58) 예수가 온 세계의 주라면 위대한 신 맘몬은 이 세계의 주가 아니다. (259) 예수가 이 세상의 주시라면 에로틱한 사랑의 여신인 여신 아프로디테도 이 세상의 주가 아니다. (260) 권력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이 세계의 주라면 이전과 다르고 좀 더 강력한 종류의 권력, 즉 약함 가운데 완전하게 되는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262) 복음은 충성을 불러일으키지 경험 자체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263)

9. ‘복음’이 창조하는 것은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의 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이다.(264) 칭의교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식탁에 속해 있다고 우리에게 선언한다. 칭의교리 자체가 교회 일치를 위한 교리이다. (265)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임을 구분 지으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공격을 가한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민족, 계층, 혹은 성별에 기초하여 자신의 지위를 주장할 가능성을 없애버린다. 아주 단순히 얘기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이외의 다른 것으로 교회의 일원임을 정의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우상숭배이다. (269)

10. 바울의 복음 선포가 그 선포에 놀란 이교도들에게 들려준 소식은 참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적이시며 세상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며, 전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서 역사와 인류 안에서 행동하셨고 또한 행동하고 계신다는 내용이었다. (271)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복음의 메시지 속에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또한 예수의 성령에 의해서 자신을 알리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 (271) 결국 기독교인들은 창조의 작은 한 조각인 그들 자신의 몸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에 복종해 드리도록 명령받는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에게 계획하신 바에 비추어 오늘을 살아야 한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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