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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라이터
사미르 판디야 지음, 임재희 옮김 / 나무옆의자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인도계 미국 작가의 소설이다. 인도에서 태어난 작가 사미르 판디야는 여덟 살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문학과 문예창작을 가르치며 글을 쓰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속에는 이러한 그의 이력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조금쯤은 자전적인 느낌, 작가 본인의 성장소설 느낌으로 읽히기도 했다.
대학원생 라케시는 우연히 인도인 맹인 작가, 아닐의 조수 일을 하게 된다.
"작가가 되고픈 강렬한 욕망이 있었음에도 정작 내 꿈을 드러내거나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실제로 작가와 가까이 지내면 글쟁이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것만 같아 아닐의 조수가 되기로 결심한 터였다." (23쪽)
그리고 조금씩 그와의 대화와 그의 생활, 아름다운 그의 아내 미라에게로 빠져들어간다. 그렇게 아닐과 미라에 대해 새롭게 발견해가는 시간들을 보낸다. "아닐은 초기에 기성 작가들을 흉내 내가며 작가의 면모를 갖추고 싶어 했더랬다. 자기 이름이 새겨진 문구 용품을 주문한다든지, 고급 만년필을 사서 점자번역가에게 사용하게 한다든지, (중략) 이런 버릇들 가운데 카페인 중독만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42쪽) 혹은 "아닐은 아는 작가들의 책 서평은 듣고 싶지 않다고 햇다. 호평은 부럽고, 악평은, 마치 자기 책의 서평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이 상한다고 했다." (57쪽) 와 같은 문장들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혀서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이처럼 이 소설 속의 작가 아닐과 조수 라케시는 둘 다 작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인가는 둘의 부부싸움을 지켜보기도 한다. "부부싸움을 지켜보니 그들의 일기를 몰래 훔쳐본 기분마저 들었다. 한편으로 미안했지만 둘 사이에 균열이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기도 했다." (73쪽) 그렇게 라케시의 마음 한켠은 언제나 부인 미라 쪽으로 뻗쳐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닐의 갑작스런 약속으로 마침내 라케시와 미라,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둘은 꽤나 긴 이야기를 나누고, 사소한 이유로 미라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말한다. "그냥 웃음을 터트릴 기회가 필요했을 뿐이에요. 조금 가벼워지고 싶었어요. 어제 일로 마음이 무거웠거든요." (81쪽)
이제 뭔가 본격적인 삼각관계가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을 주며 1부. '그 해 가을'이 끝나고, 이야기는 2부 '겨울 휴가'로 이어진다.
2부에서는 라케시가 별거중인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만나는 이야기가 기본 사건을 이룬다. 그 사건을 함께 치르며 아닐과 마리, 라케시 이렇게 세 사람은 보다 서로를 들여다보고,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3부, '봄날의 야구 경기'는 아닐이 라케시의 습작을 읽고 평을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조언은, 작가로서 감정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걸세. (중략) 진짜 중요한 것은 감정이지. 감정만 남는 거야. 자신에게 솔직해야 되네. 그리고 자네의 독자들에게도" (158쪽) 그리고 이어서 미라를 떠나보내고 싶다는 결심을 내보이며, 자신이 작업한 마지막 책의 원고를 건네준다.
이제 아닐의 책에 대해 라케시가 평을 해야할 차례이다. 그는 생각한다. "아닐은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은 빠쁘린 느낌이 들었다. 새 원고뿐 아니라 아닐이 쓴 모든 책이 그랬다." (166쪽) 그리고 봄날, 야구장에서 함께 귀로 야구경기를 듣다가, 마침내 아닐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을 듣게된다.
세 사람은 이렇게 함께 한 시간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새로운 자각을 얻게 되고, 또 좀더 어른이 된다. 그리고 아닐의 마지막 선택이 미라와 라케시에게 찬란한 기억과 깊은 흉터를 남기며 이들의 관계는 끝이 난다. 이들의 삶은 결정적으로, 영원히 각자의 방향으로 튕겨져나간다. 이로써 이야기는 끝이 난다기보다 새롭게 각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 속에서 맹인 작가 아닐은 자신의 자전적인 글들을 통해 작가로서의 명예와 안정을 누리며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한조각 진실을 숨김으로써 자신의 평생이 허위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느낌에 시달렸을거란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흘러도 결코 흐려지지 않는 그런 감각 때문에 온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했던걸까. 그리고 그런 아닐을 행복하게 해줄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라. 하지만 행복이란 타인에게 줄수도, 받을수도 없는 성격의 것이라는걸 조금씩 깨달아간다.
읽어내려가면서 처음에는 조금 맹숭맹숭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다. 글쓰기를 꿈꾸는 대학원생이 유명한 맹인 작가의 조수가 된다, 라고하는 정말 흥미로운 설정에 비한다면 더욱 싱겁게 읽혔다. 그저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그렇게 읽어나갔다. 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무게감이 느껴졌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1부보다 2부가, 2부보다 3부가 더더 멋진 소설이었다. 역자는 첫 몇페이지를 읽고 곧바로 이 소설에 사로잡혔다고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정말 많은 생각들에 사로잡히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삶과 살고 싶었던 삶 사이에서 가끔은 나 스스로 속임수를 쓰기도 한다는 걸, 살아온 세월의 길이와 죄책감의 크기가 비례할지도 모른다는 걸, 셀 수없는 선택의 순간들 속에서 언제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본인의 욕망이거나 이기심일거라는 걸... 책장을 덮으며 이런 맥락없는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