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라도 소설을 고를 때 나름의 기준이 있을텐데,
나만의 점수표에 따르면 실화에 기반을 둔 작품은 가산점을 얻는다.
<그레이스>는 실제 살인 혐의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오랜 시간 옥살이를 했던 그레이스 마크스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 소설이다. 그녀가 불과 열여섯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라운데, 사실상 열여섯이 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성인'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이미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줄곧 하층 계급으로 살았던 그레이스는 열여섯에 이미 경력있는 하녀였다. 동료하인과 고용주를 죽인 혐의를 받은 그녀는 과연 살인을 사주하고 가담한 살인마였을까? 아니면 단지 살인범에게 이용당하고 누명을 뒤집어 쓴 가련한 희생자였을까?

실존 인물이지만 드라마의 여주인공답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여러 기관 단체는 그녀의 무죄를 청원하고,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그녀의 잃어버린 조각들을 찾고자 주목한다. 이 소설은 정신과 전문의 사이먼 조던 박사가 그레이스와 상담하면서 그녀의 과거를 위시한 무의식을 찾아가는 여정이 중심 줄거리를 이룬다. 둘 사이의 상담은 평화를 위장한 채 팽팽한 줄다리기처럼 이어지고, 그렇게 소설은 전체적으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오간다.

결국 소설은 그녀의 석방과 행복한 결혼을 짧게 다루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는데 19세기를 다루는 소설에서 쉽게 보여지는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가 강하게 느껴져서 그다지 좋은 마무리로 생각되진 않았다.

스토리가 궁금증을 자아내긴 했지만 그다지 흡인력이 강한 소설은 아니었다. 살짝살짝 지루하기도 했던.. 그럼에도 그레이스의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19세기 서구사회의 분위기였다. 자연과학의 약진에 취해 점차 인간의 정신까지도 규명하고 싶었던, 감히 뇌를 가지고 실험을 자행하기까지 했던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런 가운데 심령술이 유행하고, 최면술의 과학논쟁이 오고가고, 사회는 여전히 비합리적인 일들 투성이였던 시대. 사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합리적인 것을 쫓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비합리적인 것에 현혹당하고 만다. 이런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비유나 표현이 마음에 들어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는데, 다 읽고 다시 살펴보니 역시나 요렇게 소설의 주제나 소재와 무관하지만 솔깃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있어 <시녀들>에 이어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읽기로 했던 것 같다. <시녀들> 역시도 뭔가 살짝 흡족하지 않았고 지루함을 느끼기도 했었는데도 말이다.

사이먼은 서재로 안내된다. 서재가 어찌나 남의 눈을 의식한듯 전형적인지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녀는 마흔다섯 살쯤 되어 보이고 상당히 존경받는 위치인 게 분명하지만, 레이스와 주름 장식 한 줄이 예쁘면 세 줄은 더 예쁠 거라고 생각하는 시골 사람 특유의 요란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따뜻하다. 굽실거리는 먼 친척뻘 조카에게 25센트짜리 동전을 주고 볼을 한 번 꼬집어 준 다음 오페라를 보러 얼른 도망치는, 호탕하고 성의 없는 삼촌의 목소리 같다.

이런 문장들에 나는 낚이고 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