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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모두 여덟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첫 단편의 제목은 '모르는 사람', 단편집의 제목은 <모르는 사람들>. 결국 모든 단편들이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불과 몇 쪽을 넘기기도 전에, '아.. 역시 이승우'라는 생각을 했다. 문장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한자리를 맴돌며 소용돌이를 만들고, 그렇게 크고 작은 소용돌이가 이어지며 하나의 물줄기로 흐르는 그만의 문장 속으로 나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에 한마디 반박도 못하고 그대로 설득당했다. '아.. 역시 이승우'다.
작가의 말을 통해 그는 소설을 쓸 때 시대의 간섭이 선명하다고, 소설은 그 간섭에 대한 토로이기에 가장 자율적인 것도 자율적이지 않다고 쓰고 있다.사실 이번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전보다 '시대의 간섭'을 더 받은 것처럼 느껴졌었다. 수많은 의사소통 도구들이 생기고,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시대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나의 말은 어쩌면 수많은 간섭으로 헤질대로 헤진, 전혀 자율적이지 않은 것이 아닐까. 작가 이승우의 겸손한 표현들 속에서 '나의 말, 나의 글'을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번 단편들은 그가 전에 비해 한결 아버지 혹은 신(神)과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화해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신)와 무척이나 대립각을 세웠던 지난 작품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그런만큼 세상을 향해 더 활짝 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특별히 동남아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룬 단편도 두 편이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야기들이 여전히 각 개인의 삶과 정신적 문제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전혀 영향력은 없겠지만 개인적으로 랭킹을 매겨보자면 '모르는 사람'과 '신의 말을 듣다'를 베스트로 꼽고싶다.
끝으로 그의 소용돌이치는 문장들을 옮겨적어 본다.
어떤 이야기는 자주 말해지고, 어떤 이야기는 덜 말해지거나 전혀 말해지지 않기도 한다. 자주 말해졌는데도 말해지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야기가 있고 전혀 말해지지 않았는데도 자주 말해진 것으로 간주되는 이야기가 있다.
'복숭아 향기' 중에서
반가움이 아니라 무서움이었다는 그때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갑자기 맞닥뜨린 친숙함이 가장 무섭다는 말을 했다. 친숙한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들러붙은가 뒤통수를 때리든가 간섭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고, 또 실제로 간섭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는데, 그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윔블던 김태호' 중에서
궁금한 것이 모두 물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물음은 때때로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감당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물음들은 그런 자신감 내지 책임감 없이는 물어질 수 없다. 궁금함에도 불구하고 묻지 앟거나 궁금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묻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궁금한 것들은 물어야 하지만 묻기가 어렵기 때문에 묻지 않고, 어떤 궁금하지 않은 것들은 묻지 않아도 되지만 묻기가 쉽기 때문에 물어진다.
'찰스' 중에서
이 사람이 한 말이나 저 사람이 한 말에 내용의 차이가 없으면 굳이 이 사람이 이 말을 했고 저 사람이 저 말을 했다고 구별해서 새길 이유가 없다. 우리는 하나다, 라는 안도가 이 상황이 제공하는 혜택인데, 실상 그것은 나는 고유하지 않다,의 다른 말이고, 나는 실체가 없다,를 덮는 말이고, 그러니까 허위다.
'신의 말을 듣다' 중에서
안경을 오래 쓰다보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안경이 몸의 일부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이기까지가 언제나 어렵다. 안경이 몸의 일부라는 것은 실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정한 하루' 중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의 일과가 단조롭과 규칙적이기 때문이다. 단조롭고 규칙적이기 위해서는 외부와 접촉하지 않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는데 그의 삶이 그랬다. 그가 외부에 거의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외부도 그를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중략) 습관적이거나 규칙적이다. 장필수씨는 자기가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는지 규칙적으로 그렇게 하는지 단정해서 말하지 못한다.
'안정한 하루' 중에서
덧. 습관적이거나, 규칙적이거나, 혹자는 이를 '리츄얼'이라 부르던데... 같은 행동도 이름표를 붙이는데 따라 다른 뉘앙스를 주는건 분명하다. 이름표를 붙이는 일에는 당연히도 의식적인 판단이 들어갈텐데, '안정한 하루' 속의 장필수씨는 이제 더이상 그런 판단조차 내리고 싶지 않은가보다. 그러니 습관적인지 규칙적인지 스스로의 행동을 단어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