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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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의 모험 / Adventures in Stationery>, 이 제목과 빈티지한 문구 소품이 가득 들어찬 책표지. 아... 그 유혹에 곧바로 넘어가고 말았다. 여전히 문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게 지병인지라.. 뒷날개에 실리 작가 소개글을 읽으니 더더욱 솔깃솔깃. 제임스 워드가 운영하는 블로그 이름은 ㅋ 'I like boring things'라고 하는데, 사진 속 모습 역시 무지하게 지루하게 생기신 분이다. 각도기나 딱풀 같은 것의 역사(?)에 탐닉하는 사람이라니... 한심하면서도 딱! 내 스타일인걸 어쩌랴.


사실 사물의 역사라는게, 전에 몇몇 책에서 읽어본 일이 있는데, 인간의 역사에 비하면 변변치 않은, 지루한 이야기인건 맞는 말인것 같다. 사실 이 책 역시 시종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거의 내내 흐믓한 마음으로 읽힌다. 이 작은 물건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지우개나 클립 하나가 궁극의 스타일과 기능을 갖추기까지 제법 우여곡절을 겪었구나 싶기도 하고, 어찌보면 문구 따위에 이렇게나 큰 애정을 가지고 탐구하고 기록해 온 이들이 있었다는게 재미있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문구들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작고 소박한 것들을 위해 헌신했던, 책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발명가, 사업가, 문구 도매상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품으며 책장을 덮고나서 표지 위의 펜촉, 연필깍기, 잉크, 볼펜 등등을 새삼 들여다본다. 갑자기 런던으로 문구점 순례를 떠나고 싶어진다.


단순한 문구의 역사적, 기술적 모험과정을 넘어 '문구류'에 바치는 애정어린 사색과 철학이 담긴 책이었다.

"과거에는 만년필이 우리에게 작업도구였지만 이제는 장식품에 더 까까운 것으로 변해간다. 이메일과 아이팟의 세계에서는 값싼 만년필조차 지위 상징물 (status symol)이 될 수 있다.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가 아니라 얼마나 취향이 세련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상징물 말이다."

"앞 장에는 망설이는 기색이 보인다. 그때의 손글씨는 불안해지고 조심성이 지나치다. 새 공책 앞에서는 겁이 좀 날 수도 있다. 긴장이 풀리고 제대로 써나가기까지, 찍찍 줄을 긋고 실수를 해도 좋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여자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쇼핑하는 경우가 많고, 한 아이가 뭔가를 사면 다른 아이는 그것과 다른 물건을 사기 때문에 필통 디자인이 다양한 것이라고 한다. 친구들과 똑같은 것을 갖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십대 남자 아이들은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 친구가 <사우스 파크> 필통을 가졌으면 자기도 그걸 산다."

"색인 카드는 정보를 쉽게 재배열할 수 있고, 또 새로운 정보를 어떤 시점에서든 추가하는 방식은 카탈로그를 만들거나 파일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적 절차에도 유용했다. 사물의 패턴이 사물에 앞선다."

"전구가 발명되어 사람들은 양초로 집을 밝히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양초는 사라지지 않았다. 용도가 달라졌을 뿐이다. (중략) 손에 책, 그러니까 잉크와 풀과 종이의 묶음을 쥐고 있을 때의 물리적 체험과 e-Book 의 체험 차이를 생각해보라. 문구의 한계, 잉크가 뭉개질 수 있고, 공책 종이가 찢어질 수 있다는 등의 한계는 그 매력의 일부이기도 하다. 무한히 복제되고 공유될 수 있는 컴퓨터 파일과 달리 손편지는 유일무이한 사적인 물건이다. 포스트잇에 전화번호를 적어두는 일에도 물리적인 것이 담겨있다. 물리적인 것은 뭔가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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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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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읽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던 책, 꼼꼼히 다시읽기를 하였다. 여전히 나를 설레게하는 문장들로 가득가득. 지난달부터 야금야금 읽고있는 페터 비에리(작가의 본명, 메르시어는 소설에만 사용하는 그의 필명이다)의 <삶의 격>이 보여주는 철학적 사유가 요소요소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지난번보다 더 깊이있게 읽을 수 있었다.


57년을 살아온 완고한 자신의 생활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자신감? 용기? 단순한 호기?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몸 안에서 싹트고 있던 그 무엇이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고전어 교사인 그레고리우스는 포루투칼 여인과의 짧고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이처럼 문득 낯선 리스본으로 향한다. 이전의 규칙적인 자신의 삶이 자꾸만 그를 뒤돌아보게 하지만, 삶을 바꿀 수도 있었던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리스본행 열차에 머무른다. 그리고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남자의 인생을 찾아나선다. 그를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을 만나 조금씩 완성해가는 프라두의 한 생. 그것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스타일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프라두의 인생을 완성시키는데 집중했었다면 이번에는 왠지 그레고리우스의 과거와 현재에 더 집중이 되었다. 액자 속 그림보다는 액자 자체에 더 관심이 갔다고나 할까... 액자만으로도 훌륭한 작품, 그 멋진 액자가 전혀 겉돌지 않을 만큼 멋진 그림. 바로 그런 액자소설이었다.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 요소 중 하나는 역시 언어, 음생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예민함과 철저함, 그 자체에 대한 추구 같은 것들이었다. 여인의 말 한마디 "포르투게스'에 마음이 움직였던 그레고리우스,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입니다."라는 어린 아들의 책읽는 한마디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던 프라두의 아버지... 새롭고 낯선 곳은 늘 사람을 설레게하지만 새로운 언어 또한 충분히 매력적인 것 같다. 새로운 생각의 방법 같은 것이 숨어있는 새로운 언어. 그 '다름'이 혼란을 주기보다는 막 포장을 벗긴 새 물건처럼 '반짝인다'고 느껴진다.


'말'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만큼 엄격하고 치열해질 수 있을까. 프라두는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라고 적어두었다. 그는 단지 소통을 위한 언어를 진부하다고 여기며, 그런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원하는 문장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경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고집스럽게 리스본으로 떠났던 그, 이제 스위스 베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여전히 같은 모습인 도시, 베른. 하지만 그에게는 전과 같지 않은 베른이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 그 선택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 어쩌면 모든 순간이 그런 순간이고 그 순간들이 모여 나의 시간을 채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결정짓는건 너무나 사소한 무엇일테지. 한 줌의 햇살이거나, 예기치 않은 침묵 따위일테지.


이 책이 남긴 숙제인 두 권의 책, <명상록>과 <불안의 책> 그리고 <삶의 격>까지. 읽어야할 책 리스트가 또 늘어나버렸다.

"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작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중략) 엄청난 영햘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 오빠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리움, 공울 가지고 노는 소년이 되고 싶은 소망이 묻어나는 덧 같았거든요, 오빠는 벌써 넬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중략)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 천박한 허염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프라두의 책에 있는 말이다. 창살은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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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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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문고 식구들과 함께 읽은 책은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그저 소설이려니...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저 소설이라고만 생각하고 읽으려도 자꾸만 그녀가 끼어들어 자기 변명과 자기 미화를 하는 바람에 '즐겁게' 읽히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뿌려진 작은 에피소드들과 위녕이 조금씩 성장하며 주변을 읽어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중간중간 나를 미소짓게 했다.

이것은 작가의 자기변명서이거나? 위녕의 성장소설이거나?​


아무튼 점차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요즈음이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건 제목 그대로 '우리집'이 아닌 '나의 집',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가 아니어도 각각의 구성원이 서로 마음 누이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 그러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인정받는 가족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모성애'라는 이름 밑에 한 사람에게만 의무지우는 형식의 단란함이나 서로가 서로를 소유함으로써 비로소 안심하는 그런 가족관계에서 집이란 더이상 즐거운 곳이 아닐지 모른다.




* 책 속에서 *


"아빠는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은 늘 아빠의 처절한 패배로 끝났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뭐든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이 어른들 것 같아서...


"그건 왠냐면... 결혼한 여자의 얼굴에는 빛이 없거든."  (중략)

"그거는... 그거는 위녕, 결혼을 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자신으로 살아가는가의 문제야. 그러니까... 결혼을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얼마나 지키고 사랑하고 존경하는가의 문제라니까..."


"고양이들은 서로를 부를 때 야옹. 하고 울지 않는다. 야옹이라는 소리는 오직 사람하고 소통하기 위해 내는 소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거 진짜일까? 고양이를 안키워봐서 모르겠다. 진짜라면 놀랍다...


"많이 화가 나는 일일수록 나 자신의 동기는 더 유치한 일인 경우가 많더라구. 그걸 은폐하기 위해 가져다 붙일 수 있는 모든 정당한 분노는 다 가져다 붙이더라구..."


"혹시 아무 생각도 없는 거, 그게 좋은 가정이라는게 아닐까..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 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그러나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 쉴 만큼은 튼튼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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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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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삼각관계...? 표지 그림대로 이 소설은 이런 이야기이다.


작가가 되는 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스미레에게 나는 유일한 친구이자 남자이다. 그녀는 글을 통해 생각을 하고, 생각하는 모든걸 글로 쓰고싶어한다. 그리고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그 질문에 대해서 나의 의견을 진심으로 요구"한다. 초등교사인 나는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나의 모습을 그녀에게(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노출시키게 되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뮤에게로 향해있다. 지독한 사랑이다. 우연히 만난 17살 연상의 뮤를 만나면서 그녀는 글을 쓰고자하는 욕구를 잊는다. 충만한 사랑이다. 그래서 그녀는 담배를 끊었고, 깨끗한 옷을 입고, 좌우 짝이 제대로 맞는 양말을 신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수많은 아름다운 약속들과 마찬가지로" 저녁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뮤와 함께 유럽으로 떠난다. 이제 예전에 스미레였던 그녀의 일부는 그녀 자신을 떠났다.


뮤 역시도 과거에 혼자 공중 관람차에 갇혔던 밤, 그녀 자신의 한 부분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뮤와 낯선 곳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그리스의 작은 섬에 머물던 중 뮤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스미레.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그 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고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뮤를 향한 절대적이던 사랑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진다.


나는 그녀를 찾으러 그리스의 섬까지 가지만 결국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작은 항구에 비현실적일만큼 허무하고 단정한 그녀(뮤)의 모습을 남겨두고 돌아온다.


"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잇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심하게 치명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해도, 또는 겉면에 한 장의 피부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상실되어 저쪽 세계로 가버린 나, 그 곳의 수많은 '나'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쪽 세계에 남겨진 '나'들은 모두 스푸트니크 위성처럼 외로운데...


(옮긴이의 말) 이보다 더 절대적인 고독은 있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스푸트니크는 이처럼 우리들의 절대 고독,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의 상실감과 소외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절대적인 고독감은 소설 속에서 하루키의 처절한 사색과 번민을 통해 예리하게 반영되어 묘사되고 있다."


여러가지로 딱! 하루키를 느낄 수 있는 소설이었다. 나란히 진행되는 두 개의 세계에 상상, 비현실적으로 정돈된 일상들, 상실감과 고독 속에서 무언가를 쫓는 여정 등등. 그래서 조금은 식상하지만 여전히 하루키적 상상력을 사랑하는 내게는 즐거운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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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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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이 답답해져서 잠깐씩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고르게되는 책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성실한 남자, 스토너의 한 생애를 따라가기가 그리도 힘겨운 건 아마도 행운이나 반전과 같은 어떠한 장치도 없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의 生과 너무도 딱 닿아있고, 닮아있기 때문일까.

읽는 내내 마음이 울컥하고 안타까운건 오히려 독자들이다.  우리의 주인공 스토너가 담담하고 묵묵하게 인생의 길을 견디며 걸어가는 모습은 오히려 독자를 위로하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이 끝까지 애정할 수 있는 공부의 울타리 안에서 생을 보낼 수 있었기에 그의 삶이 그리 불행하진 않다고, 그는 행복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온 마음으로 학문을 사랑했고, 자신이 쓴 책을 만지며 죽었으니... 비록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는 삶이 그리 빛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스스로 그다지 행복하다고 느끼며 살지 못했었다고 해도 끝내 열정을 바칠만한 대상이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는 행운아였을지도 모르겠다. 책표지의 그림이 그런 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참 잘 드러냈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히 줄거리를 정리해보면,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사일을 돕고, 공부도 그저 조금 쉬운 의무(노동) 정도로 생각하며 지낸 어린 시절을 보낸 스토너. 이미 17살에 중노동으로 몸이 휘어버릴 정도였다. 대학에서 농업을 공부해 집으로 돌아오려던 그는 먼 친척의 집에서 목장일을 도우며 역시나 노동과 학업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문학의 세계에 빠져든 그는 부모 모르게 전공을 바꾸고 영문학을 공부한 뒤 모교의 대학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고, 정년 즈음에 생을 마친다. 끝? 끝이다.


생활을 위한 노동만이 중요했던 성장기가 지낸 그, 그는 문학 교수로부터 장래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방에 틀어박혀 처음으로 자신에게 집중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졸업 후 강의를 맡고, 독립을 한 후 그녀를 만난다. 너무도 섬세하고 우아히게 움직이는 날씬한 그녀 앞에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서투른 인간임을 절감"한다. 그리고 결혼, 하지만 그는 한 달도 안 돼서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다. 어쨋든 큰 빛을 안고 제대로된 집을 얻고, 직접 헌가구를 수리해 자기만의 서재를 꾸미면서 조금쯤은 행복이라는걸 느끼는 스토너. 그는 가르치는 일에도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가고 자신의 책을 출판하는 등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가지만 세상사에 요령부득인 그는 결국 동료 교수와 불화하면서 대학 내에서 어려운 입지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제 마흔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다오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 그는 젊은 대학원생과 애정과 교감을 나누며  "자신은 타인에게 진정한 친밀감이나 신뢰나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최종적인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감정을 배우게 되지만 결국 그 만남은 아픈 헤어짐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젊음이나 나이와 상관이 없고 현실과도 유리된,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으로 그는 아직까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유일한 삶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아픈 몸으로 퇴직을 한 그는 거의 유일한 친구인 고든 핀치에게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생겨도 난 어떻게 써야할 지 모를 걸세.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생을 마친다.


특별히 가장 안타까웠던건 딸과의 관계였다. 서재 구석 작은 책상에서 책을 읽던, 어리지만 지성이 반짝이던 그레이스는 어느날 갑자기 아빠와 단절당한채 엄마의 욕구에 맞춰 키워진다. "스토너는 아이의 변화를 지켜보며 슬픔을 느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만을 보여주었다. 죄책감이라는 편안한 사치품을 자신에게 허락할 수는 없었다. 타고난 본성과 이디스와의 생활이라는 조검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깨달음이 죄책감보다 훨씬 더 슬픔을 부추겼고, 딸에 대한 사랑은 더운 깊어졌다." 그리고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딸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마음이 아팠다. 왜? 좀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하고 딸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않았을까? 딸이 그만큼 소중했다면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거나 넘어서는 행동을 시도해봤어야하는건 아니었을까? 아... 하지만 타고난 성격과 과거의 삶을 극복한다는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책을 읽기에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또한 매우 쉽다. (선데이 타임즈 리뷰 중에서)

(85쪽)

아직 제대로 출세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이, 그도 유난해 허영심이 강했으며 자신이 아주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는 스토너가 처음 장인을 만나는 장면에서 나오는 글이다. 남자들의 허세에 대한 매우 공감할만한 문장이었다.

(127쪽)

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울어준 사람은 바로 스토너였다. 이제 완전히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망자의 고독이 그 울음으로 조금 덜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가 운 것이 자신 때문인지, 슬론과 함께 보낸 젊은 시절이 함께 땅속에 묻히고 있기 때문인지, 그가 사랑했던 저 마르고 가엾은 사람 때문인지는 스토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 우는 데에는 정말 복잡한 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다.

(252쪽)

그는 보잘것없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배운 것들 덕분에 이런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無로 돌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문득 자신의 삶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하는 의문을 가진 스토너

(293쪽)

스토너는 빙긋 웃었다. "옛날에 데이브 매스터스가 말하기를, 자네는 개자식이 덜돼서 진짜로 출세하기 힘들 거라고 했지."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핀치가 말해따. "하지만 내가 이미 개자식이 됐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아."

(387쪽)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중략)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는 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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