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세트 - 전2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몇 해 전에 읽고는 한눈에 반해버렸던 책, 꼼꼼히 다시읽기를 하였다. 여전히 나를 설레게하는 문장들로 가득가득. 지난달부터 야금야금 읽고있는 페터 비에리(작가의 본명, 메르시어는 소설에만 사용하는 그의 필명이다)의 <삶의 격>이 보여주는 철학적 사유가 요소요소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지난번보다 더 깊이있게 읽을 수 있었다.


57년을 살아온 완고한 자신의 생활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자신감? 용기? 단순한 호기? 그것이 무엇이든 이미 몸 안에서 싹트고 있던 그 무엇이지 않았을까? 고등학교 고전어 교사인 그레고리우스는 포루투칼 여인과의 짧고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이처럼 문득 낯선 리스본으로 향한다. 이전의 규칙적인 자신의 삶이 자꾸만 그를 뒤돌아보게 하지만, 삶을 바꿀 수도 있었던 과거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는 계속 리스본행 열차에 머무른다. 그리고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남자의 인생을 찾아나선다. 그를 기억하는 주변 인물들을 만나 조금씩 완성해가는 프라두의 한 생. 그것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스타일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프라두의 인생을 완성시키는데 집중했었다면 이번에는 왠지 그레고리우스의 과거와 현재에 더 집중이 되었다. 액자 속 그림보다는 액자 자체에 더 관심이 갔다고나 할까... 액자만으로도 훌륭한 작품, 그 멋진 액자가 전혀 겉돌지 않을 만큼 멋진 그림. 바로 그런 액자소설이었다.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 요소 중 하나는 역시 언어, 음생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예민함과 철저함, 그 자체에 대한 추구 같은 것들이었다. 여인의 말 한마디 "포르투게스'에 마음이 움직였던 그레고리우스,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입니다."라는 어린 아들의 책읽는 한마디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던 프라두의 아버지... 새롭고 낯선 곳은 늘 사람을 설레게하지만 새로운 언어 또한 충분히 매력적인 것 같다. 새로운 생각의 방법 같은 것이 숨어있는 새로운 언어. 그 '다름'이 혼란을 주기보다는 막 포장을 벗긴 새 물건처럼 '반짝인다'고 느껴진다.


'말'이라는 것에 대해 얼마만큼 엄격하고 치열해질 수 있을까. 프라두는 "...문제는 그 말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라고 적어두었다. 그는 단지 소통을 위한 언어를 진부하다고 여기며, 그런 말들은 '소름이 끼치도록 낡았고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원하는 문장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청렴하고 확고부동하게 서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신의 말과 비슷하고, 또한 과장이나 격정이 없이 정확하고 간경하여 단 하나의 단어나 쉼표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고집스럽게 리스본으로 떠났던 그, 이제 스위스 베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여전히 같은 모습인 도시, 베른. 하지만 그에게는 전과 같지 않은 베른이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순간, 그 선택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 어쩌면 모든 순간이 그런 순간이고 그 순간들이 모여 나의 시간을 채우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간을 결정짓는건 너무나 사소한 무엇일테지. 한 줌의 햇살이거나, 예기치 않은 침묵 따위일테지.


이 책이 남긴 숙제인 두 권의 책, <명상록>과 <불안의 책> 그리고 <삶의 격>까지. 읽어야할 책 리스트가 또 늘어나버렸다.

"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작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중략) 엄청난 영햘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 오빠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그리움, 공울 가지고 노는 소년이 되고 싶은 소망이 묻어나는 덧 같았거든요, 오빠는 벌써 넬 살 때 글을 읽기 시작해서 (중략) 스무 살 때는 온갖 것들을 모두 알게 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기에 이르렀어요. 그러느라 공놀이 같은 건 잊은 거지요."

" 천박한 허염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예요."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프라두의 책에 있는 말이다. 창살은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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