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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새로나온 단편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종종 읽곤 하는데, 무엇보다 지금 우리 옆에서 글을 쓰고있는 한국 작가들의 글을 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 대해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창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내게 맞는 작가, 내 눈높이에 멋져보이는 글을 쓰는 작가를 나름대로 꼽아보는 재미도 있다. 2016년을 맞아 읽은 책은 제 1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이다. 작가 한강의 작품은 사실 처음이다. 늘 읽어봐야지.. 벼르던 작가였다. <희랍어 시간>과 <소년이 온다>를 미뤄두고 결국 단편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최종심에 오른 작가들 중 김애란과 황정은의 단편들은 늘 좋았던 기억이 있어 모든 작품들에 기대감이 컸다.
굳이 세월호를 끌어들일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는 늘 터무니없는 폭력과 죽음이 널려있다. 심상해보이는 건조한 한 줄의 기사, 한 장의 보도사진 뒤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눈물이 깃들어 있을지,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의 머리와 가슴은 얼마나 호되게 멍들어 있을지. 과연 상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심사평에서 심진경 평론가는 "이번 본심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된 한강과 권여선, 조혜진의 소설은 모두 (중략) 죽음과 고통, 죄의식 등과 같은 문제를 그들 고유의 문학적, 윤리적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세 작품 모두 일인칭 '나'가 친지와 직장 선배의 죽음 직전 혹은 직후에 관한 관찰적 증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표제작이자 수상작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는 부당해고, 출근투쟁, 천막농성이 소재이면서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결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이에 맞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입장, 윤리의 문제와 남겨진 이의 마음 속 균열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리움이나 추억이라 불리기에도 애매한 기억들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을 또한 이야기 한다. 話者인 그녀에게 평화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아니요, 불가능해요. 이 세상에서 평화로워진다는 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죽고.
나는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뒤척이고 악몽을 꾸고.
내가 입을 다물었는데 누가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이를 악물고 억울하다고 , 억울하다고 말하고.
간절하다고, 간절하다고 말하고.
누군가가 어두운 도로에 던져져 피흘리고,
누군가가 넑이 되어서 소리 없이 문을 밀고 들어오고,
누군가의 몸이 무너지고, 말이 으스러지고, 비탄의 얼굴이 뭉개어지고.
권여선의 <이모>는 아들만을 편애하는 어머니 밑에서 가장 역할과 남동생 치닥거리로 내리막의 삶을 견뎌온 시이모가 홀연 잠적했다가 암환자가 되어 2년만에 나타나고, 일주일에 한번씩 그녀를 만나 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이모는 내게 말한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지도록 하자. 나는 네가 글을 쓴다는 것도 좋지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
이모는 또한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타적인 면도 있고 인내심도 강하시지.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 하는거 아니겠니?"
마침내 가족을 떠나 잠적하는 그녀에게 가족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해자? 천형?
가족을 떠나 자기만의 우주를 구축했던 짧은 마지막 2년의 삶만이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을까? 외부와 스스로를 끊어내고 오직 책만 읽으며 보내면서도 그녀는 한편으론 끊임없이 과거를 복기하고, 불가해한 장면들을 애써 풀이해보며 지냈다. 현재는 가족과 절연했지만, 과거의 자신과는 끊임없이 만나며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뭔가 설명 같은걸 하고 싶었던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를 살게 한... 그 고약한 게..."
이기호의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매일같이 시위를 시작하면 어떤 마음이 될까. 이 '안타깝지만 성가신' 일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무형의 부채감과 사회적인 것의 함수를 작가 특유의 감각으로 흥미롭게 써내고 있었다.
황정은의 <웃는 남자>에서그는 과거의 아픔을 하나하나 소환하고, 곱씹고, 스스로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거의 반사적으로 이기적이 되어버리는 '그'는 과연 소설 속에만 있는 그일까? 외면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나를 포함한 '우리' 독자들에게 작가는 묻고있는 것만 같다. 살아있는 자, 살아남은 자로써 떠난 이들을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하는거 아니냐고 묻고있는 것만 같다.
"그때 내 곁에 서있던 노인이 내 쪽으로 쓰러졌고 간발의 차이로 나는 그를 피해 비켜섰다. (중략) 그는 조짐도 없이 기울어지기 시작해서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퍽, 하고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다른 차원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처럼 버스가 크게 회전했을 때...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있는 힘껏 붙들었지.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녀가 아니고 가방을 붙들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