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작
이현주 글.그림 / 책고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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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내가 좋아하는 분의 닉네임과 같아서 무조건 호감백배다.

물론 그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보아도, 소리내어 읽어봐도,

참 느낌이 좋은 한마디이다. '나무처럼'.


이 동화책 속의 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작가는 글도 쓰고, 직접 그림도 그렸다.

글로 하고 싶은 말을 너무나 잘 아니까,

딱 맞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먼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고

거기에 스토리를 입혔을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치기도 했다.


열 살짜리 어린 나무 한그루가 트럭에 실려 나즈막한 맨숀단지로 이사왔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흐르고

키높이에 맞춰 일층, 이층, 삼층...의 이야기를 엿보며 나무는 자란다.

일층 교습소의 피아노 소리에 귀기울이기도 하고

이층 화가가 그린 자신의 모습에 설레이기도 하고

삼층 콩이네 아기 강아지들이 자라는 걸 지켜보기도 하고

스무살이 되었을 때는 홀로 사시는 사층 할머니의 슬픔에

함께 울기도 했다.


그렇게 외로움을 모르고 사람들과 함께 자란 나무.

그리고 스물다섯살이 되어서 마침내 건물 꼭대기에 이른다.

바라보이는건 자신의 긴 그림자 뿐이었다. 혼자의 시간,

나무는 이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는 어디까지 자랄까?"


그리고 훌쩍 제 그림자를 넘어선 나무는 마침내 만나게 된다.

건물 너머에 있는 다른 나무들의 인사소리를.


연한 색감의 부드러운 그림 느낌도 참 좋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파트 건물 너머에 펼쳐진 너른 세상에는 다른 건물들도 있었지만

나무를 반갑게 맞으며 손을 흔들어 준건 다른 나무들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이런저런 것들에서 때로는 위로를 찾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일테다.

나무에게 가장 힘이 되어준 것이 나무들이었던 것처럼.


짧은 몇 문장으로 나무의 한 생을,

작은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으며 어른이 되어가고

자신과 마주하는 사유의 시간을 지나

모두의 '우리'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는 아름다운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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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내성적인
최정화 지음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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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낯선, 아직은 젊은(79년생) 작가 최정화의 단편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을 읽었다.

표제는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에서 앞부분만 따온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소설 속 중심인물들을 한데 묶는 키워드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린 누구나 단단한 자기 껍질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단단한 관계의 틀 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좀처럼 운신의 폭을 넓히고, 변신을 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단단한 것에도 균열은 있기 마련.

그 틈새는 예기치 않은 순간, 사소한 몸놀림으로 벌어지기 시작해

때로는 삶을 뒤집어 놓거나, 주변 누군가를 빠뜨려버리기도 한다.

책을 읽는 내내

바로 그런 실금같은 균열에 대한 이야기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의 모든 단편이 그러하듯 소설들은

뭔가 행복의, 혹은 불행의 예감을 남기며 이야기가 툭 끊어진다.

하지만 그것이 happy엔딩인지, sad엔딩인지를 말하기 애매하다.

아주 많~이 애매하다.

지극히 내성적이지만, 뭔가가 송두리째 뒤집어질듯도 하고

지극히 비극적 인물 옆에는 새로운 시작에 살그머니 미소짓는 누군가가 있기도 하다.


성공적인 실패의 무수한 반복 속에서 흐려져가는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오가닉 코튼 베이브'와

철학책 한 권에서 존재의미에 눈떴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하나의 허위에서 또다른 허위로 옮겨가는 이야기인

'파란 책'은 특히 기억해두고 싶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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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쓰시마 유코 지음, 김훈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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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단편 소설집이면서, 한줄로 나란히 이어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인 까닭은

이 소설들이 私소설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의 작가는 <인간실격>으로 잘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의 딸로,

한살 때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동반자살을 한 후

어머니와 장애가 있는 오빠, 언니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이후 오빠가 죽고, 사춘기를 맞은 작가는 집을 떠날 생각만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 역시 미혼모가 되어 두아이를 데리고

어머니집 근처로 돌아오게 되는데,

몇년 후 본인도 아들을 잃게 된다.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일을 '나'라는 나무에서

굵은 가지 하나가 잘려나간 일이라고 적고 있다.

그 일로 '나'라는 나무의 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나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계속 글을 썼다고 한다.


앞쪽의 소설 세 편은 아들을 잃기 전에 쓰인 것들로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어머니와의 화해를 모색하는 이야기이고,

뒤의 세 편은 아들을 잃은 후의 무력감과 현실과의 분리감 등을

주로 꿈의 복기를 통해 써내려가고 있다.


앞 쪽의 소설들에서도 죽음과 상실, 꿈은 늘 상존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직접 겪은 오빠의 죽음, 애완견과 애완묘와의 이별 등등.


"나는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끈질기게 도망쳤다."    (욕실)중에서


뒤 쪽의 소설들을 읽으면서는 '애도하는 일'과 '애도를 끝내는 일'에 대해

생각케 했다.

아직 정말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상상의 공감에 그칠 수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것이 아무리 적확하고 일반적인 표현이라 해도, 나는 아들 아이가 죽엇다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맙다. 화가 나는데 그치지 않고 경멸감이 든다. 안됐다, 가엾다고 하는 사람도 용서할 수가 없다. 기운 좀 차렸나요, 라고 묻는 사람에게도 화가 나고, 지금쯤 천국에서 즐겁게 지내고 있을 거예요, 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사람은 아예 무시한다. 그렇지만 스스로도 적합한 말을 찾지 못했다."     (자카 도프니-여름 집) 중에서


"삶이란 이렇듯 늘 분주하기 마련이다.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때는 실컷 슬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 시간도 없이 이제 죽나 싶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고, 언제 죽을지 미리 안다 해도 다른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슬퍼한 겨를이 없을지도 모른다."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모든 죽은 이의 날)에서 파리에 머물다 돌아가게된 작가는 "일본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기쁘겠어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진정 '돌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작가는기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 난감해 '모르겠어요.'라고 중얼거리게 된다. 엄밀히 말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 장소, 그 상황은 오직 그 시간에 한 번뿐인 사건일테니까 말이다. 가장 근사해보이는 어떤 다른 곳으로 가는 일만이 있을 뿐, 우리는 어디로도 돌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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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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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 속 에피소드 혹은 역사적 은유, 사실과 진실 사이의 그 무엇들...

이 모든 것들이 한 작가의 손에서 교묘히 엮여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라고 선언적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쨋든 내가 받은 최종적인 인상은 그렇다.


에덴동산이라는 고원에서 쫓겨나 강가로 이동하는 우리 조상의 모습에서 최초의 농업혁명과 연관된 이동을 떠올렸고, 문자의 발명과 법령의 등장과 모세 이야기가 겹쳐지기도 했다.


아무튼 시작은 이렇다. 모두가 알다시피 카인은 아벨의 재물만을 기꺼이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와 젠채하는 아벨의 태도에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하지만 그는 망보는 자도 훔치는 자도 모두 도둑이라며 하나님에게 당당히 공동책임을 묻는다. "여호와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벨을 죽인다." (42)라고까지 말하는 카인. 결국 하나님은 카인의 이마에 유죄의 증표이자 동시에 보호의 증표를 내린다. 그리고 카인은 이 표식을 지닌채 시공간을 넘나들며 구약에 나오는 여러 사건 현장에 등장해 상황에 참여하고, 지켜보고, 하나님께 설명을 요구한다.


'의식도 없이, 책임도 없이, 죄책감도 없이' 황야에서 첫 밤을 보내고 놋 땅에서 진흙밟는 사람이 되었다가 나귀를 타고 떠나 또다른 현재 속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만나고, 또다른 현재에서 바벨탑을 쌓는 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카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태도에 대해 회의한다. 피조물의 호기심을 단죄하고, 끊임없이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하나님에 대해.


"인류의 역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오해의 역사이니, 하나님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06)


"여호와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데, 왜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163)


"꼭 사탄이 여호와의 또다른 도구에 불과한 것처럼 보여요.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넣고 싶어하지 않는 더러운 일을 하는 도구 말이예요." (169)


마침내 노아의 방주에 동승하게된 카인은 하나님을 향한 최후의 일격을 가하게 되는데...



읽는 내내 곳곳에 심어져 있는 작가의 유머를 읽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환상적인 내용을 시침 뚝 떼고 덤덤하게 써내려간 것 자체가 가장 결정적인 유머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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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다 -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
신혜정 글.그림 / 마음의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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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다 : 매우 탐스럽거나 한창 성하다.


봄이 되면 요란하게는 아니더라고 나는 '봄을 탄다'. 봄에 몸과 마음을 슬쩍 얹어놓고 봄을 핑계로 마음을 흩어놓거나, 해묵은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며 뒹굴거린다. 정작 찬란한 봄햇살은 외면한채 방구석에서 '봄'에 무임승차를 하는 꼴이다. 그리고 이 책 <흐드러지다>를 집어들었다.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라는 부제. 물론 나는 결코 혼자이기 힘들고, 아름다운 청춘은 더더운 아니지만... 시인이 글을 쓰고 직접 그림까지 그려넣은 작고 할랑한 여행 에세이에 손이 갔다.


너무나 완벽해보이고 번쩍거리는 사진들로 빼곡한 책이 아니어서 좋았다. 마음을 톡톡 두드리는 글들이 좋았고, 조금은 엉성해보이는 소박한 그림들이 좋았다.


독일과 터키, 라다크 여행기가 차례로 실려있는 느릿한 시간의 기록들이다. 낯설음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 낯익음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이 여행지를 서성대는 시인의 시간들 사이에서 졸졸졸 흘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시를 쓰는 이들의 글은 산문을 주로 쓰는 이들의 글보다 결이 곱고 깊다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것을 보러다니는 여행기는 물론 아니다. 잠을 깨고, 골목 사이를 걷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그 단순한 시간들이 오히려 마음 속의 역동성을 깨우는 그런 여행 이야기이다. 글을 읽다보면 내 몸 속 에너지의 총량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다. 다분히 행적적인 일들, 자잘한 일들, 불필요하게 복잡한 일들, 못난 욕망들에 내 에너지의 건의 전부를 써버리고 마는 '나'의 하루하루. 조금쯤은 의식적으로 나의 마음에 에너지를 양보해야만 하겠지..


독일에서 시인은 '시간 앞에 흐드러지'고 싶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책에서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단지 끈질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는 그런 시간들, 오래 전부터 있던 나무들이 무성한 공원에서 기꺼이 길을 잃는 그런 시간들. 사고가 철학을 낳고, 그 안에서 물리학이 나고 자랐음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매우 거대하거나 지극히 작은 것을 구하는 물리학이 얼마나 탐미적인 학문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작가의 아인슈타인 이야기는 특별하게 읽혔다.


터키 여행의 부제는 '당신과 흐드러지다'이다. 혼자인 빈 틈을 채워주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내게는 오히려 '말(語)로 흐드러지다'로 읽혔다. 낯선 지명이 익숙해지고, 한두마디씩 거칠고 성글게 터키어를 익히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에 잠이 깨고... 이렇게 서서히 자신만의 기억이 되어가던 이스탄불, 그리고 터키. 깜짝 놀랄만큼 오래된 역사 유적이 평범한 도서관이 되고, 일상을 향유하는 발밑의 길이 되는 곳. 그 곳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왠지모를 향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여행기는 '마음으로 흐드러지다' 라다크로 이어진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그 라다크. 이상적인 지역 공동체에서 가장 큰 죄는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시인이 그려낸 라다크의 단편들과 그림들 속에는 늘 산이 있다. 숲이 아닌 설산. 해발 3,500 미터에서 시작하는 라다크의 중심부 '레',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해 보이는 산이 토양과 광물이 품은 제 빛으로 빛나는 그 곳, 문명이 성큼 멀어져버린 그 곳에서 시인은 편안히 내면으로 흐드러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고 한다.


관광지화 되어가는 곳에서 때론 마음이 불편해지다가도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비현실적인 달을 보았을 때, 끝없는 고요를 느끼며 자연스레 손을 하늘로 뻗쳤다고도 한다. 나라도 저절로 우주 만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 아득히 높은 곳의 어린 구름들과 청정한 히말라야의 바람과 알록달록한 천 위에서 경전의 글귀들이 나부끼는 곳에 선다면 어떻게 기도하기 않을 수 있을까?


할 일이 없어도 좋고, 할 일이 많아도 좋고,

혼자여도 좋고, 함께여도 좋고,

낯섦은 우리에게 주변의 모든 것과 나 자신에 좀더 예민해지라고 말한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여행이 줄 수 있는 그 모든 역동성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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