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다 -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
신혜정 글.그림 / 마음의숲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흐드러지다 : 매우 탐스럽거나 한창 성하다.


봄이 되면 요란하게는 아니더라고 나는 '봄을 탄다'. 봄에 몸과 마음을 슬쩍 얹어놓고 봄을 핑계로 마음을 흩어놓거나, 해묵은 여행 책자를 뒤적거리며 뒹굴거린다. 정작 찬란한 봄햇살은 외면한채 방구석에서 '봄'에 무임승차를 하는 꼴이다. 그리고 이 책 <흐드러지다>를 집어들었다.


'혼자여서 아름다운 청춘의 이야기'라는 부제. 물론 나는 결코 혼자이기 힘들고, 아름다운 청춘은 더더운 아니지만... 시인이 글을 쓰고 직접 그림까지 그려넣은 작고 할랑한 여행 에세이에 손이 갔다.


너무나 완벽해보이고 번쩍거리는 사진들로 빼곡한 책이 아니어서 좋았다. 마음을 톡톡 두드리는 글들이 좋았고, 조금은 엉성해보이는 소박한 그림들이 좋았다.


독일과 터키, 라다크 여행기가 차례로 실려있는 느릿한 시간의 기록들이다. 낯설음에 대한 동경과 설레임, 낯익음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이 여행지를 서성대는 시인의 시간들 사이에서 졸졸졸 흘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시를 쓰는 이들의 글은 산문을 주로 쓰는 이들의 글보다 결이 곱고 깊다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것을 보러다니는 여행기는 물론 아니다. 잠을 깨고, 골목 사이를 걷고, 다시 잠자리에 들고... 그 단순한 시간들이 오히려 마음 속의 역동성을 깨우는 그런 여행 이야기이다. 글을 읽다보면 내 몸 속 에너지의 총량에 대해 떠올려보게 된다. 다분히 행적적인 일들, 자잘한 일들, 불필요하게 복잡한 일들, 못난 욕망들에 내 에너지의 건의 전부를 써버리고 마는 '나'의 하루하루. 조금쯤은 의식적으로 나의 마음에 에너지를 양보해야만 하겠지..


독일에서 시인은 '시간 앞에 흐드러지'고 싶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책에서 "물리학을 믿는 우리 같은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단지 끈질긴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있다"는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는 그런 시간들, 오래 전부터 있던 나무들이 무성한 공원에서 기꺼이 길을 잃는 그런 시간들. 사고가 철학을 낳고, 그 안에서 물리학이 나고 자랐음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매우 거대하거나 지극히 작은 것을 구하는 물리학이 얼마나 탐미적인 학문인지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에 작가의 아인슈타인 이야기는 특별하게 읽혔다.


터키 여행의 부제는 '당신과 흐드러지다'이다. 혼자인 빈 틈을 채워주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내게는 오히려 '말(語)로 흐드러지다'로 읽혔다. 낯선 지명이 익숙해지고, 한두마디씩 거칠고 성글게 터키어를 익히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 소리에 잠이 깨고... 이렇게 서서히 자신만의 기억이 되어가던 이스탄불, 그리고 터키. 깜짝 놀랄만큼 오래된 역사 유적이 평범한 도서관이 되고, 일상을 향유하는 발밑의 길이 되는 곳. 그 곳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왠지모를 향수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여행기는 '마음으로 흐드러지다' 라다크로 이어진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된 그 라다크. 이상적인 지역 공동체에서 가장 큰 죄는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던가...? 시인이 그려낸 라다크의 단편들과 그림들 속에는 늘 산이 있다. 숲이 아닌 설산. 해발 3,500 미터에서 시작하는 라다크의 중심부 '레',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해 보이는 산이 토양과 광물이 품은 제 빛으로 빛나는 그 곳, 문명이 성큼 멀어져버린 그 곳에서 시인은 편안히 내면으로 흐드러질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고 한다.


관광지화 되어가는 곳에서 때론 마음이 불편해지다가도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서 비현실적인 달을 보았을 때, 끝없는 고요를 느끼며 자연스레 손을 하늘로 뻗쳤다고도 한다. 나라도 저절로 우주 만물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까? 아득히 높은 곳의 어린 구름들과 청정한 히말라야의 바람과 알록달록한 천 위에서 경전의 글귀들이 나부끼는 곳에 선다면 어떻게 기도하기 않을 수 있을까?


할 일이 없어도 좋고, 할 일이 많아도 좋고,

혼자여도 좋고, 함께여도 좋고,

낯섦은 우리에게 주변의 모든 것과 나 자신에 좀더 예민해지라고 말한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여행이 줄 수 있는 그 모든 역동성을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