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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여인의 속삭임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평점 :
러시아 문학에 그들만의 분위기가 있듯이, 남미 작가의 작품들 역시 독특한 색깔을 가지는 것 같다. 영미문학이 살짝 싱거운 요리라면 러시아 문학에서 푹 끓인 깊은 맛이 나고, 남미 문학에선 뭔가 묘한 향신료가 뒤섞인 맛이 난다고 할까... 순전히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그렇다. 그래서그런지 뭔가 중독성이 있는것도 같다.
이야기는 베로니카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레베카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이 만남이 너무나 껄끄러운 베로니카. 집요하게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하며 그녀의 삶에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레베카. 이런 관계는 사실 학생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늘 따돌림당하는 레베카를 바라보면서 베로니카는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늘 외면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들 몰래 레베카를 만나 책과 음악, 영화를 공유하며 우정을 키워간다. 그리고 졸업파티에서 결정적 사건을 계기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 베로니카는 '외면하기'를 통해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 베로니카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죄를 묻고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 40대에 들어섰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을뿐 아니라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며 멋진 내연남까지 둔 베로니카 앞에 불쑥 나타난 레베카. 레베카 역시 이모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사업체를 꾸리며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어쩔수 없는 고독 속에 갇혀있다.
이 두 여인의 내면을 베로니카의 시선에서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몸을 향한 현대인들의 왜곡된 욕망과 인간관계속에서 상처를 받고있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속삭이듯 보여준다. 끊임없이 외모와 멋지게 보이는 어떤 것들에 집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떠올리고 절망하는 베로니카는 늘 타인의 욕구에 자신의 욕망을 맞춰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완벽한 몸매는 마지막 종교나 다름없다. 타이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그들의 종교가 추구하는 바이고, (중략) 고래 여인 레베카는 현대사회의 희생물이자, 가치관이 왜곡된 사회를 비판는 역설적인 메신저로 해석될 수 있다." (역자의 글 중에서)
한편으로 심리스릴러물처럼 살짝 오싹하기도 하고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와 비슷한 분위기), 두 주인공을 둘러싼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있음직하고 개성적인 퍼레이드도 보여주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책 속에서
(81쪽) "레베카는 메신저였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났던, 거의 잊고 지냈던 모든 것을 (중략) 특히 우리의 대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대화들,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남은 생존다였다."
(116쪽) "마리타는 그날을 위해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다양한 의상을 챙겨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서로 다른 옷들을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한다. 의상과 신발을, 치마와 블라우스를, 목걸이와 귀고리를 매치한 다음, (중략) 결국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 길고 병적인 연출 과정의 일부를 지켜보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녀를 증오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항상 나보다 더 멋진 옷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142쪽) "우리 모두는 교회에 도착하는 신도들처럼 기분이 호전될 거라는 마음으로 피트니스클럽에 들어선다."
(185쪽)
"요즘 신문은 아무거나 내주는가 보구나."
"아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전 그 신문사에서 일하잖아요."
"알았다, 얘야, 너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가 쓴 글들은 거기서만 통용된다는거. 요즘도 글을 샤워하고 화장하면서 쓰는거냐?"
(214쪽) "욕실의 고독이란 여자의 마지막 권리가 아닐까. 그곳만큼은 남자들의 자의식에 편승해서 만족해야 하는 의무가 없는 곳 아닐까. 욕실은 남자들을 섬기지 않고, 남자들에게 예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없고, 남자들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침묵의 특권."
(227쪽) "추억이란 차츰 자라나는 어떤 일들 같아. 결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거 말이야."
(268쪽) "이 회색빛 정오, 히론 이카의 흐릿한 카페에서 나는 혼자다. 아버지도, 친구들도, 지오반니도 없다. 레베카도 없다. 나는 혼자다. 그것은 형벌이자 특권이다. 나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275쪽) "난 저런 인물들을 보며 쉬는거야. TV 드라마를 보는 건 동물원에 가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동물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동물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이잖니." /베로니카의 아버지
(344쪽) "나는 항상 나의 고상함과 나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저속한 사람들에게서, 답답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들은 레베카의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정면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나의 눈에 지옥을 기억하게 만드는 모의에 가담했다."
(345쪽) "과거는 뒤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어떤 일들로부터 나오는 베일이며,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피다."
(347쪽) "나는 모두에게 나는 무관하다는 것을 동의해주길 요구했다. 그것은 다른 범죄보다 더 위선적인 범죄행위였다. 이제 내가 모른 척했던 나의 죄악들이 유령의 목소리로 되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