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 오브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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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년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 '연젠가는...'이란 생각을 품어왔고, 그 길은 여전히 내게 '언젠가는...'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현실적으로는 한발자국도 가까워지지 않았지만, 그 길을 걷고싶다는 열의는 여전히 뜨거운 편이다.


그렇게 다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이 책은 특히 두가지 점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하나는 젊은 여성의 글이라는 점이다. 아직 이다지도 젊은데...? 무엇이 그녀를 이 길고 고독한 여정으로 이끌었을까...? 또다른 하나는 절반 정도가 길을 실재로 걷는데 유용한 정보와 팁들에 할애되어 있다는 점이다. 뭔가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될 때 실용서로서의 역할을 해줄수도 있을 책이다.


그 길을 걷게 된 그녀의 스토리는 어찌보면 조금 빤하기도 하다. 성실한 직장생활, 하지만 어느순간 마주한 한계,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은 과연 뭘까.. 하는 자문. 이런 숙제들을 안고 작가는 배낭을 꾸렸다. 학생 시절 여행길에서 만난 한국인 교수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장소라고 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로 떠나기 위해서.


"선생님은 거기서 뭘 얻으셨나요?" 나는 물었다.

"얻은 것이 아닙니다. 버렸지요."  (25쪽)


여행을 하는 것이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과 '아무리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을 골라내고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자신을 되돌아본 그녀는 결국 자신이 공황장애에 빠진 이유가 일 때문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란걸 뼈저리게 자각하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도망친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에게 "도망치는게 뭐가 나쁜데?" (76쪽)라는 이야기를 듣고 문제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면 안 된다'는 말에 사로잡힌 자신의 고지식함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길이 거듭되고, 길 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녀의 생각들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뼈대가 생기고, 살이 붙는다. 걷는 동작으로 몸이 단련되듯이 마음도 조금씩 단련되어가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듯 읽혔다.


"일자로 쭉 뻗은 길에 몸을 맡기고, 그저 담담히 걷는다. 그 공백의 시간 속에 돌연 번쩍하는 섬광이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중략) 별안간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엄청난 기세로 찰칵찰칵 맞춰져 빛의 속도로 답이 떠오른다. '아아! 그건 그런 의미였구나!'하고" (93쪽)

갈수록 한결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그녀의 모습이 느껴진다. 순례 시작무렵이었다면 스스로에게 절대 버스이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그녀지만 20일이 지난 그녀는 더이상 걷기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몸이 지친 하루는 버스로 이동한다. 그리고 내 일에만 열심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를 위해 일하고, 나를 위해 화를 내고," 했던 자신을.


목적지를 앞두고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것 같아 초조해하기도 하지만, 그 곳에 도착해 "카미노는 성지에 도착했다고 끝난 게 아니야.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여행인 거지." (143쪽)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아직 그대로의 '나'이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나의 길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응원한다. 그렇게 그녀의 길은 끝났고 동시에 시작되었다.



뒤쪽은 순례 기초 지식부터 준비물, 먹거리 이야기까지 실용적인 정보들이 꼼꼼하게 실려있다. 그 중 내게 쏙 들어온 팁 중 하나는 '나의 페이스를 지키자(Take your time.).'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늘 어려운 내게 작가는 도움의 손길을 활용하는 것도 쾌적한 여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충고하고 있었다. '과도한 정보 수집은 하지않기'라는 소제목을 가진 짤막한 글도 실려 있었다. 이 여행의 묘미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감각에 몰두하는데 있다는 거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몰두해서 걷는 길, 관계 속에서 감사함을 느끼며 걷는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의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산티아고 길은 들어와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서 치워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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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여인의 속삭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6
알론소 꾸에또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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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에 그들만의 분위기가 있듯이, 남미 작가의 작품들 역시 독특한 색깔을 가지는 것 같다. 영미문학이 살짝 싱거운 요리라면 러시아 문학에서 푹 끓인 깊은 맛이 나고, 남미 문학에선 뭔가 묘한 향신료가 뒤섞인 맛이 난다고 할까... 순전히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 그렇다. 그래서그런지 뭔가 중독성이 있는것도 같다.


이야기는 베로니카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등학교 동창이던 레베카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이 만남이 너무나 껄끄러운 베로니카. 집요하게 그녀와의 만남을 시도하며 그녀의 삶에 한발자국씩 다가오는 레베카. 이런 관계는 사실 학생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뚱뚱하다는 이유로 늘 따돌림당하는 레베카를 바라보면서 베로니카는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늘 외면하기만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들 몰래 레베카를 만나 책과 음악, 영화를 공유하며 우정을 키워간다. 그리고 졸업파티에서 결정적 사건을 계기로 둘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 베로니카는 '외면하기'를 통해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 베로니카에게 과거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죄를 묻고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 40대에 들어섰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했을뿐 아니라 여전히 미모를 유지하며 멋진 내연남까지 둔 베로니카 앞에 불쑥 나타난 레베카. 레베카 역시 이모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사업체를 꾸리며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어쩔수 없는 고독 속에 갇혀있다.


이 두 여인의 내면을 베로니카의 시선에서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몸을 향한 현대인들의 왜곡된 욕망과 인간관계속에서 상처를 받고있는 그들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속삭이듯 보여준다. 끊임없이 외모와 멋지게 보이는 어떤 것들에 집착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떠올리고 절망하는 베로니카는 늘 타인의 욕구에 자신의 욕망을 맞춰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지 모른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완벽한 몸매는 마지막 종교나 다름없다. 타이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그들의 종교가 추구하는 바이고, (중략) 고래 여인 레베카는 현대사회의 희생물이자, 가치관이 왜곡된 사회를 비판는 역설적인 메신저로 해석될 수 있다."  (역자의 글 중에서)


한편으로 심리스릴러물처럼 살짝 오싹하기도 하고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와 비슷한 분위기), 두 주인공을 둘러싼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있음직하고 개성적인 퍼레이드도 보여주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책 속에서


(81쪽) "레베카는 메신저였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났던, 거의 잊고 지냈던 모든 것을 (중략) 특히 우리의 대화,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대화들, 그녀는 내 기억 속에 살아남은 생존다였다."


(116쪽) "마리타는 그날을 위해 부산을 떨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먼저 다양한 의상을 챙겨서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서로 다른 옷들을 어떻게 조합할지 고민한다. 의상과 신발을, 치마와 블라우스를, 목걸이와 귀고리를 매치한 다음, (중략) 결국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 길고 병적인 연출 과정의 일부를 지켜보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그녀를 증오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항상 나보다 더 멋진 옷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142쪽) "우리 모두는 교회에 도착하는 신도들처럼 기분이 호전될 거라는 마음으로 피트니스클럽에 들어선다."


(185쪽)

"요즘 신문은 아무거나 내주는가 보구나."

"아빠,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전 그 신문사에서 일하잖아요."

"알았다, 얘야, 너 자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가 쓴 글들은 거기서만 통용된다는거. 요즘도 글을 샤워하고 화장하면서 쓰는거냐?"


(214쪽) "욕실의 고독이란 여자의 마지막 권리가 아닐까. 그곳만큼은 남자들의 자의식에 편승해서 만족해야 하는 의무가 없는 곳 아닐까. 욕실은 남자들을 섬기지 않고, 남자들에게 예쁘게 보여야 할 필요가 없고, 남자들의 시중을 들지 않아도 좋은 곳이다. 침묵의 특권."


(227쪽) "추억이란 차츰 자라나는 어떤 일들 같아. 결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거 말이야."


(268쪽) "이 회색빛 정오, 히론 이카의 흐릿한 카페에서 나는 혼자다. 아버지도, 친구들도, 지오반니도 없다. 레베카도 없다. 나는 혼자다. 그것은 형벌이자 특권이다. 나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은."


(275쪽) "난 저런 인물들을 보며 쉬는거야. TV 드라마를 보는 건 동물원에 가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동물원에서 산책을 하거나,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동물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이잖니." /베로니카의 아버지


(344쪽) "나는 항상 나의 고상함과 나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여전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나는 저속한 사람들에게서, 답답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런데 하루는 그들이 나를 붙잡았다. 그들은 레베카의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들은 정면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나의 눈에 지옥을 기억하게 만드는 모의에 가담했다."


(345쪽) "과거는 뒤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어떤 일들로부터 나오는 베일이며,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 피다."


(347쪽) "나는 모두에게 나는 무관하다는 것을 동의해주길 요구했다. 그것은 다른 범죄보다 더 위선적인 범죄행위였다. 이제 내가 모른 척했던 나의 죄악들이 유령의 목소리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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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쪽
마르셀 서루 지음, 조영학 옮김, 무라카미 하루키 후기 / 사월의책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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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이야기에는 늘 예감이 포합되는데, 그 예감은 현실의 공기와 맞닿으면서 구체적인 성찰이 되며, 이것이 다시 새로운 예감을 낳는다. 이것은 분명 이야기만이 제공할 수 있는 특별한 순환이다."


이 책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후기 중 일부이다. 그는 이 소설을 직접 번역해 처음 일본에 소개하였다고 한다. 애정하는 하루키씨가 애정한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읽게된 책이다.


이 책을 한마디로 규정해보자면 '근미래 디스토피아 소설'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까운 미래라면 얼마나 가깝다는걸까? 적어도 위에서 하루키가 언급했듯이 '현실의 공기와 맞닿'아 있다고 할만큼은 가깝다고 느껴졌다. 디스토피아의 고전이라 할만한 작품들이 늘 그렇듯 이 책 역시 바로 현재의 여러 국면들, 현재 인류의 면모들을 펼쳐 보여준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 이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여러 소문들은 있지만, 살아남은 한 명 한명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들은 있지만, 결국 그 파멸의 시작점은 어느 누구도 정확히 알 지 못한다. 그리고 지구의 먼 북쪽에 띄엄띄엄 살아남은 이들과 혹독한 생존의 몸부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생존자 한 명의 이야기로부터 소설은 점차 확대되어간다. 그리고 그 전개의 사이사이에는 크고 작은 반전들이 끊임없이 끼어든다. 치열한 생존의 장이란게 그리 평탄할리 없으니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우리는 운이 좋을 때는 운이 좋은지 모르고 산다. 난폭하지 않은 사람들과 살고, 일하는 대가를 받고, 지붕 슬레이트나 수리하고, 왜 빵이 부풀지 않는지 걱정할 때가 운이 좋을 때다." 하지만 이미 그런 따뜻했던 시절은 끝장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도 있다. 자동피아노와 책을 아직은 땔감으로 쓰지 않았다. "이 시대에 더 이상 설 자리없는 무용지물들, 하지만 내가 쓰레기나 먹고, 주저 없이 살인을 하고, 춤을 추거나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갈망까지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문명 따위와 얽히지 않고 북쪽을 터전으로 살아온 퉁구스 부족들이 있다. 그들은 어쨋든 아직은 살아남아있다. "단순한 생활방식일수록 수명이 길다. 복잡한 기계가 먼저 깊옆으로 나가떨어진다."


사실 나의 가족은 일찌기 문명을 등지고, 신앙에 기대어 황량한 북쪽으로 이주해왔다. 결핍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나름의 평화와 예절을 유지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인가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누며 공존하기에는 모든게 터무니없이 부족해졌고, 결국 갈등은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적어도 이 마을에는 '나' 혼자 살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아니라 해도 사람에 대한 기대를 온전히 저버릴 수가 없"는 나. 하지만 "결국 선함이란 시대가 허락할 때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날 나는 비행기가 날아와 추락하는 장면을 보게된다. 그리고 어딘가 아직 '문명과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에 기대에 비행기가 날아온 방향을 향해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리고 문명의 찌꺼기와 사람들의 무리를 마주치게 되지만...


이렇게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이 최선이겠다는 생각도 했다. 200년 후면 이 땅은 비가 깨끗이 씻어버리고 인간의 잔재라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서 지구의 역사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층이 되어 로마는 물론 피라미드를 지은 조상들 위에 덮이리라." 


문명은 사라져가고 있다. 나는 또한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 종족이야말로 우리 이전의 어느 존재들보다 더 아름다운 모양들을 만들었다. 솔직히 신의 솜씨도 조잡할 때가 있다. (중략) 과연 우리가 긋기 전에 지상에 직선이라는 피조물이 존재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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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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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여름맞이 이벤트, 스릴러읽기의 첫 책은 서평도서로 받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살인을 정당화해주는 듯한 '죽여 마땅한 사람'이란 말은 좀 섬뜩하다. 그리고 출판사 홍보문구  "마치막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어느새 당신은 살인자를 응원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를 읽으며 과연 그럴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릴리, 그녀는 이미 13살 나이에 '죽여 마땅한' 한 남자를 치밀한 계획 하에 대담하게 살해한다. 이후 욕망(돈), 불륜, 배신이 뒤엉키며 죽이려는 자들 사이에 반전이 거듭된다. 


1부, '비행기 여행이라는 특별한 거품 속에서' 테드와 릴리는 만난다. 아내의 불륜으로 고민하는 테드에게 릴리는 살인을 권한다, 자신이 돕겠다면서.


2부에서는 테드의 아내 미란다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녀는 남편을 살해하고 돈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불륜 상대는 남편의 살인에 이용할 도구일 뿐이다. 아내는 남편을 노리고, 남편은 아내를 노리는 상황이다. 그리고 선수를 친 사람은?


3부에서는 살인사건의 중심에 있으면서 꼬리가 잡히지 않는 릴리와 그를 쫓아 서성이는 킴볼형사가 중심인물이다. 분명 뭔가가 있는데... 킴볼형사는 결국 개인적으로 릴리를 추적하기에 이른다.


책장이 넘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릴리의 계획이 멋지게 성공하기를.. 하며 조마조마해 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이런, 나도 어느새 살인자를 응원하고 있었으니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다.


책 속에서 릴리는 말한다. 


"솔직히 난 살인이 사람들 말처럼 그렇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먼저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예를 들어 당신 부인은 죽어 마땅한 부류같은데요."  (48쪽)


물론 터무니 없는 논리이다. 생사를 가르는 판단을 자신이 내릴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사람의 존재 이유를 그의 도덕성 한가지만으로 결정해버린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릴리의 이런 말도 안되는 가치는 거의 성공하는 듯 보인다. 아무리 무의식중에 독자들이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건 좀...


하지만 여기 마지막 반전으로 책은 마무리 된다. 릴리를 응원하던 독자들은 안타까울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마지막 문장이 끝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집중력 최고의 악녀 이야기 <죽여 마땅한 사람들>. 잠시 윤리의식 따위, 더위 따위 날려버리고 그저 픽션으로서 즐길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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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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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눈부신 '흰'들에서 그녀가 읽어낸 것은 죽음, 혼령 같은 것들이었다.

여기 내가 있고,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언니)가 있고, 그 밖의 세상 속 '흰'들이 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한강의 목록을 눈으로 읽으며, 머리로는 그녀가 놓친 흰 것을 바삐 떠올려보는 것으로 책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들었던 '화이트 아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모든 원근감과 공간감이 사라진다는 화이트 아웃. 바르샤바에서 한강은 그런 상태로 이곳과 저곳,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 사이를 정처없이 오가며 이 글을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65편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히면서도 그녀와 언니와 세상, 그리고 각각의 흰 것들끼리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편의 긴 소설로도 읽힌다. 때로는 그 연결이 지나치게 딱 붙어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더럽혀질 것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위태로워보인다. 차갑고 눈부시고 냉랭하지만 한편으론 설움 비슷한 것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개인적으로 내가 흰 것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러했었다. 그리고 한강의 '흰'을 읽으며 연기나 파도처럼 하얗게 흩어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보태어졌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나서 한강은 그녀의 언니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을 벗어버렸을까?



*책 속에서


(26쪽)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51쪽)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성근 눈이 흩어질 때,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후략)"  // 소리도, 감정도, 색깔도... 그 아무것도 실려있지 않아서, 눈(雪)은 세상을 지울 수 있는 힘을 가진다.


(69쪽)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무엇이 두 마리 토끼이고 절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 달에 가보니 토끼가 없다더라는 말에 안도했던 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이는데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는것 때문에 초조했던 어린 시절의 생생한 기억.


(81쪽)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과 흰빛, 검음과 불꽃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83쪽)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 그래서 때론 과거의 따뜻한 기억 한나가 우리를 살게하고, 때론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이 확대 재생산되며 끊임없이 나의 현재를 갉아먹는다.


(88쪽)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흥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 흰 조약돌 이야기이다. 예전에 친구가 나를 닮았다며 유원지에서 주워다준 흰 조약돌이 떠올랐다. 그 돌의 무엇을 보고 그녀는 나를 떠올렸던걸까?


(95쪽)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98쪽)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무언가를 '다시' 한다는 일은 언제나 처음보다 어렵다. 이미 알아버린 그 일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109쪽) "이 도시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넔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 충분하고 온전한 애도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소문의 주인공처럼 취급당하다가 급하게 잊혀져버린 이 땅의 수많은 죽음을 떠올린다. 심장이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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