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눈부신 '흰'들에서 그녀가 읽어낸 것은 죽음, 혼령 같은 것들이었다.

여기 내가 있고,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언니)가 있고, 그 밖의 세상 속 '흰'들이 있다.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한 봄에 내가 처음 한 일은 목록을 만든 것이었다."


한강의 목록을 눈으로 읽으며, 머리로는 그녀가 놓친 흰 것을 바삐 떠올려보는 것으로 책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들었던 '화이트 아웃'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모든 원근감과 공간감이 사라진다는 화이트 아웃. 바르샤바에서 한강은 그런 상태로 이곳과 저곳,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 사이를 정처없이 오가며 이 글을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65편의 흰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처럼 읽히면서도 그녀와 언니와 세상, 그리고 각각의 흰 것들끼리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편의 긴 소설로도 읽힌다. 때로는 그 연결이 지나치게 딱 붙어있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더럽혀질 것 같아서, 곧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위태로워보인다. 차갑고 눈부시고 냉랭하지만 한편으론 설움 비슷한 것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개인적으로 내가 흰 것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러했었다. 그리고 한강의 '흰'을 읽으며 연기나 파도처럼 하얗게 흩어져버리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이 보태어졌다.


이 글을 마무리하고나서 한강은 그녀의 언니에 대한 부채감 같은 것을 벗어버렸을까?



*책 속에서


(26쪽) "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진다. 압도하듯 무거워진다. 지난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 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였다는 생각이 들 만큼."


(51쪽) "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쁨도 슬픔도 없이 성근 눈이 흩어질 때, 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 때, (후략)"  // 소리도, 감정도, 색깔도... 그 아무것도 실려있지 않아서, 눈(雪)은 세상을 지울 수 있는 힘을 가진다.


(69쪽)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무엇이 두 마리 토끼이고 절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 달에 가보니 토끼가 없다더라는 말에 안도했던 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이는데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다는것 때문에 초조했던 어린 시절의 생생한 기억.


(81쪽) "흰 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과 흰빛, 검음과 불꽃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83쪽)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 그래서 때론 과거의 따뜻한 기억 한나가 우리를 살게하고, 때론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이 확대 재생산되며 끊임없이 나의 현재를 갉아먹는다.


(88쪽)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흥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 흰 조약돌 이야기이다. 예전에 친구가 나를 닮았다며 유원지에서 주워다준 흰 조약돌이 떠올랐다. 그 돌의 무엇을 보고 그녀는 나를 떠올렸던걸까?


(95쪽)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방금 울었거나 곧 울게 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처럼.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98쪽)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무언가를 '다시' 한다는 일은 언제나 처음보다 어렵다. 이미 알아버린 그 일을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109쪽) "이 도시 사람들이 그 벽 앞에 초를 밝히고 꽃을 바치는 것이 넔들을 위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안다. 살육당했던 것은 수치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가능한 한 오래 애도를 연장하려 하는 것이다."  // 충분하고 온전한 애도조차 받지 못하고, 그저 소문의 주인공처럼 취급당하다가 급하게 잊혀져버린 이 땅의 수많은 죽음을 떠올린다. 심장이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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