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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오노 미유키 지음, 이혜령 옮김 / 오브제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수년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막연하게 '연젠가는...'이란 생각을 품어왔고, 그 길은 여전히 내게 '언젠가는...'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 현실적으로는 한발자국도 가까워지지 않았지만, 그 길을 걷고싶다는 열의는 여전히 뜨거운 편이다.
그렇게 다시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나는 혼자 스페인을 걷고 싶다, 먹고 마시고 걷는 36일간의 자유>. 이 책은 특히 두가지 점에서 나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 하나는 젊은 여성의 글이라는 점이다. 아직 이다지도 젊은데...? 무엇이 그녀를 이 길고 고독한 여정으로 이끌었을까...? 또다른 하나는 절반 정도가 길을 실재로 걷는데 유용한 정보와 팁들에 할애되어 있다는 점이다. 뭔가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될 때 실용서로서의 역할을 해줄수도 있을 책이다.
그 길을 걷게 된 그녀의 스토리는 어찌보면 조금 빤하기도 하다. 성실한 직장생활, 하지만 어느순간 마주한 한계,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은 과연 뭘까.. 하는 자문. 이런 숙제들을 안고 작가는 배낭을 꾸렸다. 학생 시절 여행길에서 만난 한국인 교수가 가장 감동을 받았던 장소라고 했던 '카미노 데 산티아고'로 떠나기 위해서.
"선생님은 거기서 뭘 얻으셨나요?" 나는 물었다.
"얻은 것이 아닙니다. 버렸지요." (25쪽)
여행을 하는 것이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과 '아무리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을 골라내고 '나'를 찾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자신을 되돌아본 그녀는 결국 자신이 공황장애에 빠진 이유가 일 때문이 아니라 타인과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란걸 뼈저리게 자각하면서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도망친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이에게 "도망치는게 뭐가 나쁜데?" (76쪽)라는 이야기를 듣고 문제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면 안 된다'는 말에 사로잡힌 자신의 고지식함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렇게 길이 거듭되고, 길 위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녀의 생각들을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뼈대가 생기고, 살이 붙는다. 걷는 동작으로 몸이 단련되듯이 마음도 조금씩 단련되어가는 과정이 눈에 보이는듯 읽혔다.
"일자로 쭉 뻗은 길에 몸을 맡기고, 그저 담담히 걷는다. 그 공백의 시간 속에 돌연 번쩍하는 섬광이 나타나는 순간이 있다. (중략) 별안간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엄청난 기세로 찰칵찰칵 맞춰져 빛의 속도로 답이 떠오른다. '아아! 그건 그런 의미였구나!'하고" (93쪽)
갈수록 한결 자신에게 너그러워진 그녀의 모습이 느껴진다. 순례 시작무렵이었다면 스스로에게 절대 버스이동을 허락하지 않았을 그녀지만 20일이 지난 그녀는 더이상 걷기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몸이 지친 하루는 버스로 이동한다. 그리고 내 일에만 열심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나를 위해 일하고, 나를 위해 화를 내고," 했던 자신을.
목적지를 앞두고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한것 같아 초조해하기도 하지만, 그 곳에 도착해 "카미노는 성지에 도착했다고 끝난 게 아니야. 오히려 그때부터가 진짜 여행인 거지." (143쪽)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아직 그대로의 '나'이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나의 길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스스로를 응원한다. 그렇게 그녀의 길은 끝났고 동시에 시작되었다.
뒤쪽은 순례 기초 지식부터 준비물, 먹거리 이야기까지 실용적인 정보들이 꼼꼼하게 실려있다. 그 중 내게 쏙 들어온 팁 중 하나는 '나의 페이스를 지키자(Take your time.).'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늘 어려운 내게 작가는 도움의 손길을 활용하는 것도 쾌적한 여행을 위해 필요하다고 충고하고 있었다. '과도한 정보 수집은 하지않기'라는 소제목을 가진 짤막한 글도 실려 있었다. 이 여행의 묘미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감각에 몰두하는데 있다는 거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몰두해서 걷는 길, 관계 속에서 감사함을 느끼며 걷는 길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의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산티아고 길은 들어와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음 한켠에서 치워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