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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는 인간 Homo Viator - 정신과의사 문요한이 전하는 여행의 심리학
문요한 지음 / 해냄 / 2016년 7월
평점 :
'oo하는 인간'이라는 말은 조금 유행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제목처럼 들리기도 한다. 뭐라도 할 수 있는 인간 시리즈처럼도 읽혀서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다보니 여전히 수렵채집시대의 DNA 지배를 받는 우리 인간에게 여행은 얼마나 필요하고, 밀접한 것인지에 대해 설득당하게 되고, 참으로 마땅한 제목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책은 신경정신과 의사가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하고 스스로에게 1년간의 안식년을 주어 여행을 떠났던 체험적인 이야기와 인간 심리의 여러 문제들과 그 풀이를 함께 써내려간 책이다. 여행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사색들이 풍부하게 담겨있어 여행체험이 오히려 묻히는듯한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행예찬서'라고 해도 될법한 책이었다.
작가는 동물원이 동물들에게 자연적인 환경을 제공하고 적절한 자극을 주는 풍부화 프로그램이 동물들을 건강하게 해주는 것처럼 여행은 "도시 동물원에 갇힌 현대인의 가장 대표적인 풍부화 프로그램이"라고 하면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텔레필로스 섬 이야기를 들려준다. 쉴 새없이 빛이 내리쬐는 섬에서 휴식을 모르는 거인들은 하나같이 잔인하다고 한다. 우리 역시 어둠이 사라져버린 사회에서 휴식과 이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지만 휴식은 단지 無활동 상태를 말하는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속도와 건강한 자극, 자신과 맞고 영혼이 원하는 활동으로 채워진 적극적 휴식으로서의 여행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진정한 휴식은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능동적인 몰입이라는걸 그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통해 깨달았다고 한다.
여행 중의 사진찍기에 대한 이야기도 크게 공감한 내용 중 하나였는데, 여행에서 "촬영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뇌는 덜 느끼고 덜 기억한다"면서 일을 쉬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 인한 과잉 활동이라고 말한다. 조금 지나친 단순화일수도 있지만 놀거나 쉬는 것에 대한 현대인의 죄의식이 여행을 또하나의 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역시 빠른 시간내에 많은 성과를 달성해야하는 목표처럼 만들어버리는 이런 '노동으로서의 여행'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취향으로의 여행에서 그는 도시로의 여행과 자연으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문명과 도시를 더 선호하지만 여행 후 더 오래 기억되는 장면은 자연과 함께 있었던 시간, 자연이 보여주었던 풍경들인 경우가 많은 걸 보면 새삼 나의 자연지향을 깨닫게 되곤 한다. 그저 가만히 존재하는 것으로도 경탄을 부르고, 마음이 크게 출렁이는 눈 앞의 자연, 그너머 하늘과 우주, 늘 거기 잇지만 온전히 그것들을 바라볼 시간을 내야하고 때와 장소를 찾아내야 하는게 우리 현대인들이다. 하지만 아직 지구가 오늘날처럼 군데군데 찢어지고 헤어지고 덧칠되기 전, 우리의 먼 조상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이 경이로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유영하듯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터 섬에서의 여행일기에 작가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그 곳에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한편으로 그는 "하지만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는 사람이나 사회적 역할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행지에서도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다"며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 중 '뚜껑열린 병' 이야기를 인용한다. 뚜껑 열린 병을 물 속에 박으면 쉽게 물이 차듯이, 자신을 활짝 열어놓는다는 것이 여행에서 얼마나 소중한 준비일지를 생각하며, 혹시 나는 자꾸만 뚜껑을 닫고 나로 향하려는 여행자는 아니었을지를 되짚어보기도 했다. 놀이에 푹 빠져있는 어린아이같은, 뚜껑이 활짝 열린 병같은그런 여행자가 진정 온전한 여행자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만큼이나 내 안에 숨어있는 또다른 나를 만나는 것이 여행의 참 의미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마지막으로 나오는 글에서 여행으로 모두를 초대하는 마음을 자신의 자작시로 표현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그대여! 지금 들판으로 오라.
이 빛을 한가득 담아 가자.
이 빛이 우리를 다시 빛나게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