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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新생활명품
윤광준 지음 / 오픈하우스 / 2017년 3월
평점 :
때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 사물에 대한 이야기에 더 끌린다.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나름의 물성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사물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지고 사용되면서 사물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보인다. 사람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기도 하고,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형태미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흥미롭다.
이전에 <윤광준의 생활명품>을 읽으며 그의 글과 사진에 매료되었던 일이 있다. 그래서 지난번 책장 정리를 하며 많은 책들을 떠나보냈지만 그 책은 여전히 남겨두었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이 <윤광준의 新생활명품>이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물건과 어떤 이야기들을 들고 왔을지 기대를 가지며 읽게되었다.
저자 윤광준은 <남자의 물건>같은 재미난 책들과 방송출연 등으로 잘 알려진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절친(아마도?)이어서 서로의 책에 종종 등장한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데, 특히 이번 책에는 김정운의 추천의 글이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다. "장담컨대 <윤광준의 新생활명품>을 읽고 나면 '나만의 물건'을 사야 할 이유가 아주 버라이어티해진다"고 그는 쓰고있다. 대세인 미니멀리즘을 따르자면 물건을 버려야할 이유가 백만가지쯤 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물건을 사야할 이유가 버라이어티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버리고 사는 것은 결국 한 줄에 꿰어진 구슬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동이 없는 물건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감동을 주는 물건은 과감히 질러야 한다,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을 꾸려가기 위해선 적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의 품질이 최고 수준이 아니면 안 되지요." (61쪽)
많은 물건들이 등장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작가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소함의 가치'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사소해 보이는 물건일수록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소모품 취급을 받거나 정성을 쏟은 만큼 부가가치가 생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산다는 것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과 뒹구는 일이다." (78쪽)
이런 맥락에서 이 책에는 소위 강소기업, 한우물 파는 기업의 사소하지만 완벽한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위 중에서도 콧수염 가위, 신발이 아닌 신발깔창, 칼이 아닌 칼갈이, 와인이 아닌 와인따개, 마음까지 긁어준다는 등긁개.. 이런 것들이 당당히 주인공으로 실려있다. 마음에 쏙 드는 콧수염 가위를 찾기까지의 지난하고 피나는(진짜 피다) 그의 여정은 차라리 눈물겹다. 모든 신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깔창하나에 집중한 회사, 1965년부터 오직 깔창만을 연구하고 만들어온 회사, 그것도 한국 회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놀랍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외로움까지 달래줄만한 속시원한 등긁개를 앞에 두고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기도 하다.
"등긁개 우습게 보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랃 등 긁어준 사람이었느냐?" (89쪽)
이정도 패러디라면 안도현 시인도 껄껄 웃어넘길만 하지 않은가.
물건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결국 물건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읽다보면 '물건' 그 자체는 이 책의 주인공이기보다 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언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은 결국 그 대상에 상관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것 같다. 콧수엽 가위 편에서 다채로운 취향에 대한 이야기 끝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를 좀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게다. 대범하게 사는 척 하지 마라. 사이와 사이의 어떤 지점쯤 있을지 모르는 확신을 향해 다가서는 게 깊이다. 사이를 메우려는 노력은 한 사람의 전 인생일 수도 있다. 깊이가 없는 인간에게 나올 이야기란 없다." (94쪽)
요즘 커피에 관심있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커피 관련 제품도 눈에 띄었는데 그 중 하나가 '몽벨' 커피 드리퍼이다. 4그램의 무게로 드리퍼와 필터를 겸하고 있어서 집 밖 언제 어디서든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이 물건, 막상 보면 굉장히 소박하다. 겨우 이런거야? 소개가 너무 거창한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오리지널과 짝퉁은 보기엔 비슷해도 천지차라는걸 우린 안다. 그는 말한다.
"단순함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살아보면 안다. 이 작은 물건을 만드는 데는 아마도 수십년의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 담긴 흔적을 통해 읽어낼 내용은 자못 숙연하다." (121쪽)
막상 자주 떠나진 못해도 늘 머리 한구석에 여행에 대한 생각을 달고 살아서인지 여행과 관련된 물건들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몇가지는 정말 사고싶어졌다. 그 중 하나가 리모바 알루미늄 캐리어인데, 그의 유혹적인 설명글을 읽다보면 당장 지갑을 들고 나서고 싶을 지경이다.
"리모바 표면의 굴곡진 이미지는 융커스 전투기 동체에서 따왔다. 과거의 유물이 된 아름다운 비행기는 1950년 캐리어로 현신해 생명을 이어간다. 비행기나 캐리어나 온 세상을 떠돌긴 마찬가지다." (124쪽)
왠지 새가 되어 살아남은 공룡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다. 그렇다고 당장 사러 나설수는 없겠지... 하지만 '삼진어묵' 정도라면 당장 사러 나설 수 있다. 종종 사먹고 있기는 하지만, 진짜 부산어묵이라는 줄줄이 역사를 꿰어주니 오늘 저녁상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며칠 내로 맛있는 연잎 밥을 먹으로 시내에도 다녀와야겠다.
물건이라는, 어찌보면 소소해보이는 소재 속에 다채롭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