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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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다, 라는 뭔가 귀에 설고 익숙지 않은 표현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 만으로도 궁금증이 커진다. 끝까지 뺏기는 자는 누구? 바보이거나, 무엇엔가 홀려있거나?

뺏는 여자, 리아나는 변신에 재능이 있고 그것을 즐긴다. 반면 뺏기는 남자, 조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조금은 찌질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뭔가 일상을 뒤엎을 모험을 은밀히 꿈꾼다. "한 명은 확실히 죽였고, 다른 한 명은 죽였을 확률이 높은"(21쪽) 리아나를 20년 만에 우연히 바에서 마주친 조지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도발적이면서도 지극히 순진무구한 눈초리를 지녔던 그녀. 대학 신입생 당시의 그 꿈같던 한 학기의 시간,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던 시간들. 이 20년 전 이야기와 다시 그녀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불규칙하게 교차하며 소설은 이어진다.

이제 그녀는 철저히, 제목처럼 아낌없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시작한다. 20년 전에 이미 진짜 그녀와 마주쳤던 그는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조지는 그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134쪽) 그렇다. 조지는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를 믿겠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품는 이런 근거없고 싶체없는 희망은 그를 그녀 범죄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결국 그녀의 계획들은 차근차근 수행되어가고, 더는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그는 생각한다.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더는 리아나에게 속고 싶지 않다"(286쪽)라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그녀는 엄청난 다이아몬드와 함께 사라진다. 그에게는 다만 큰 트라우마만을 남긴 채로. 이제 그에게 "늘 상냥해 보였던 세상이 곧 참사라도 일어날 것만"(332쪽) 같다. 그리고 마침내 가닿은 조지의 결론은 그를 죽음 앞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를 죽음에서 구해낸 것도 리아나였다는 것이다.

그는 20년 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또렷이 떠올린다. 그녀는 자기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결코 잘못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누구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 아니냐고. 제법 설득력이 있다. 자신이 선택한 모습이 어쩌면 진짜 자신과 더 가까울 수도 있는거 아니냐는 리아나의 주장 말이다. 하지만 조지는 누구도 과거를 완전히 지울수는 없고, 과거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가볍게 언쟁을 벌인다. 그녀는 20년 만에 또다른 이름으로 그 앞에 나타났고, 그는 20년 전과 똑같이 그녀라는 덫에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건의 현장을 홀로 다시 찾아간다. (이 장면은 책의 첫 부분에 프롤로그 형식으로 실려있다.) 그녀가 남겨두었을지 모르는 흔적을 찾아서. 그리고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라는 책 사이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엽서. 다만 그 곳이 멕시코 킨타나로주 툴룸의 마야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엽서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는 당연히 그 곳으로 향한다. 여전히 빼앗길 것이 남아서, 기꺼이 아낌없이 빼앗기기 위해서일까?

흔히 쓰는 표현 중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일상이 무료할 때 약간의 가슴뛰는 일을 바라기도 하는데 위험한만큼 매력적이다. 소설 속에서 리아나와에게 휘둘리던 20년 전의 조지는 "희열을 느꼈다. (중략) 평생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일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마더 대학과 고향 집의 따분한 현실은 무미건조한 잿빛 과거로 물러났다." 라고 적고 있다. 위기와 기회가 한 몸이듯이 위험한 일은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년만에 리아나가 다시 나타났을 때, 조지는 속속 다가오는 위험을 느끼고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뚜벅뚜벅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이 아닐까. 무미건조한 일상을 깨는 매력적인 상황 속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치마폭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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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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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라디오 프로의 애청자 사연이란걸 듣다보면 절로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세상에나... 어쩜 이리도 착하고 반듯한 사람들이 많은걸까. 모두들 상냥하고 악의없고...'  반면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 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접하게 된다. 내가 사는 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어쩌면 그래서 사람 사이의 따뜻한 유대로 술술 풀리는 소설이 있는가하면 이 <저스티스맨>같은 惡만을 말하는 소설이 있는가보다. 놀라운건 양 극단에 서 있는 소설이라도 비슷한 정도로 공감하게 된다는 점이다. 진부한 비유지만 손바닥과 손등이 있어야 하나의 완성된 손이 되듯이, 세상에는 이 두가지 면이 모두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惡에 대한 소설에 집중하는 일은 꽤나 피로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날 인터넷에 공개된 한 장의 사진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영화의 한장면도 아니고 조작된 것도 아닌 실제 살인 현장사진이다. 그리고 이마에는 선명한 두 개의 탄흔. 이후 이어지는 살인과 두 개의 탄흔. 장이 넘어갈 때마다 피해자들의 사연이 하나씩 공개된다. 저스티스맨은 인터넷 까페를 만들어 그들이 왜 죽어마땅했는가를 추적해 올리고, 살인이 거듭될수록 까페도 그 피를 먹고 자라는 짐승처럼 점점 커진다.

첫 피해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밝혀지는 살인범의 정체는 우리 사회에서 너무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그래서 늘 논의에서 제외되는 그런 사람이다. 하고싶은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하고, 그저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그날, 그 도시, 그 거리에 혼자 내버려져 있었던 일이 실상, 일상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은 아니었"(23쪽)다. 그렇게 심하게 취했던 밤, 그의 행적은 소위 인터넷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그는 (그나마 다니고 있던) 보험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전혀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가족을 뒤로하고 "그는 떠나고 싶어서 떠났다." 그리고 연쇄살인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소설의 초점은 (나름의 정의와 사연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들의 악행과 더불어 더이상 생각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누리꾼들과 더이상 진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이는 언론들에게 맞추어져 있다. 점점 커지는 까페 회장으로서 "저스티스맨의 댓글은 어느덧 교주의 포고령이라도 되는 듯한 위력을 지니게 된(93쪽)"다. 그리고 "소문이란 게 늘 그렇듯,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얼마나 흥미로운 내용인가가 더 중요하게 취급(143쪽)"되고 힘을 가진 자들의 구성이면 소수의견일지라도 얼마든지 질실의 가공이 가능하다. 킬러는 그저 살인을 계속할 뿐이지만 정의의 사도가 되었다가,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가,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모두가 떠나고 나면 쉽게 잊힌다. "우리들의 킬러 카페도 이젠 모든 회원이 탈퇴하고 매크로로 돌아가는 사행성 도박 광고 게시물만 꼬박꼬박 업데이트되었다."(239쪽)

거의 항상 인터넷과 연결중, 그렇게 새로운 정보과 가치를 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제대로 생각하는 일은 멈추어버린지도 모르겠다. 유명인들의 가치관에 기대어 미래를 설계하고, 다수의 지지를 받기에 진실처럼 보이고 멋져보이는 무언가를 내 일상에 그대로 내려받고 있는건 아닐까?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라는 자체가 아예 사라진 시대를 마치 허우적거리듯이 살아가고 있는(242쪽)"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떠나 새롭게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킬러, 그는 어느 미술관 벽면에서 잭순 폴록의 작품을 보고 "자신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증오가 커다란 화폭 위에 화려하게 발화(發花)되어 있는(246쪽)"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실체로 형상화하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쇄 살인이 시작된다. 액션 페인팅으로 우연히 얻어지고 그로써 완성되는잭슨 폴록의 작품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사회로부터 극한적으로 배제되었던 킬러에게는 증오의 발화로 보였던 것이다.

서서히 빠져드는 소설이 아니라, 단번에 푹 빨려들어가고 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인지 읽어나가면서는 그 안에서 계속 머물며 허우적대는 것이 피로하게 느껴졌고, 얼른 발을 빼고 싶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부릅뜨고 지켜보고 생각해봐야할 우리 시대의 한 면이기에 중간에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그렇게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를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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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철도 분실물센터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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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어느날 전철 안에서 펭귄을 본다면? 아마도 인증샷부터 찍으려 들거나 혹은 내가 제정신인지 확인해보거나, 아니면 소설 속 교코처럼 허둥대다가 물건을 놓고 내리거나... 책장이 채 석장도 넘어가기 전에 제목 속의 모든 것들, 즉 펭귄과 철도와 분실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두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각 장마다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마치 철도(우리로 말하자면 전철)이 중간중간 환승역에서 만나듯이 아주 살짝 겹쳐 지나기도 한다.

1장에서 혼자 사는 교코는 일년째 품고 다니던 고양이의 유골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진정한 애도의 마음으로 고양이를 떠나보내고, 자신의 마음도 돌이켜보게 된다. 2장의 중심인물은 히키코모리인 후쿠모리 겐이다. 게임 아이템을 얻기 위해 2년여만에 외출(모험)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부적처럼 지녔던 어린 시절의 러브레터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 과정에서 세상 밖에도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깨닫고,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되찾는다. 가장 공감하며 읽었던 3장 속의 지에는 모든 삶의 과정이 떠밀려온 듯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택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끊임없이 핑계를 만들고, 대충대충 둘러대며 살았던 게으른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책임지는 진짜 어른이 되기위해 이력서를 쓴다. 4장은 자수성가한 성실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지만 아들과 끝내 화해하지 못한 준페이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찾게되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이 분실물 센터가 찾아주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이다.

철도를 타고 혼자서도 잘 다니는 펭귄, 비현실적일만큼 상냥한 빨간머리 분실물센터 역무원만으로도 뭔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침 뚝 떼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고있으면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었으면, 귀여운 펭귄과 빨간머리 역무원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는 진심어린 마음이 솔솔 솟아난다. 그 곳에 가면 내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언가, 소중했지만 잊어버리고만 어떤 기억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전반적으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살짝 가볍고, 어찌보면 조금 진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결국 이 세상에 시시한 이야기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시한 인생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맥빠질만큼 시시하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하루를 보낸 날, 이렇듯 낯간지럽고 따뜻한 책을 읽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또 누군가에게는꼭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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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넘어 인문학 - 미운 오리 새끼도 행복한 어른을 꿈꾼다
조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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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을 배경으로 세 명의 소녀가 그려진 표지만 보면 뭔가 달콤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동화'라는 단어가 단순한 환상과 행복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이 책 또한 그저 달콤한 동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 처럼 그 '넘어'에 있는 인문학과 만만치않은 진짜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실려있는 책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에 또르르 눈물을 흘리고,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 소녀가 살아내야 했던 세상에 분노할 수 있는 동화읽기가 담긴 책이다.

동화 한 권 마다에 담긴 내 마음 혹은 세상을 풀어내고, 이어서 그와 관련해 조금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성인용 소설 혹은 인문학 도서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환상과 꿈과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함과 추함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화. 요즈음 많은 작가들이 동화 비틀어 쓰기를 하고 있는데, 굳이 새로운 틀을 가져오지 않고도 전통 동화의 틀만으로도 충분히 하고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들이 만들어진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뀐 것처럼 보이고, 어떤 면에서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바뀌었지만, 사람의 감정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가장 먼저 소개되는 이솝 우화 <당나귀와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사람들의 '말(言)'에 휘둘려 최악의 결과에 이르는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솝우화 뒤쪽에는 대충 이런 문제가 붙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주변의 온갖 말들에 흔들리지 마라. 아마도 가장 표면적인 교훈일텐데, 왠지 <미움받을 용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남의 일에 말을 보태지 마라. 이런 교훈도 생각해 볼 수 있을테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은 결국 불가능하다, 라는 문장도 떠오른다. 이 이야기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을 맺고 있다.

"결국 실패한 그 아버지와 아들을 다시 생각합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오만하게 자신의 길이 전부라고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을 옹호하고 싶어졌습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는 실수와 행동을 통해 삶에 대해 배워 가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33쪽)

"우리는 각자 누군가의 대나무 숲이 되어 주어야 한다"(65쪽)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는 참 따뜻하게 읽혔다. 도시화되고 모두가 자신만의 방에 틀어박히면서 대나무 숲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소소해보이는 사연과 이야기를 라디오를 통해 들으며 때로는 피식 웃어버리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대나무 숲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 오는 것들'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전래동화 <은혜갚은 까치>이야기는 꼭 1대1로 교환되는 것은 아니어도 선한 행동이 결국은 돌고돌아 돌아온다는 오래된 믿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동화 뒤에는 신영복의 <더불어 숲>이라는 책을 붙여두었다. 그 책을 읽으며 신영복 선생님의 생각에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화엄경의 한 구절도 함께 소개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정말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었다.

"인다라의 하늘에는 구슬로 된 그물이 걸려 있는데 구슬 ㅎ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추고 있어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 그 울림이 연달아 퍼진다 한다." (84쪽)

피터팬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 초인을 연결지어 놓은 것은 새롭고 흥미로웠고, 여러 공주 이야기를 비판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풀어놓은 것들은 익숙하면서도 보다 다채롭게 바라볼만한 부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헌된 권위와 우리를 착취하는 속임수에 위해 노예로 전락하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들 때, 한번쯤 네버랜드 쪽을 쳐다볼 필요는 있습니다. 네버랜드가 너무 즐겁고 시끌벅적해서 목적을 잊어버릴 것 같다거나, 알록달록한 그림이 가득한 책을 들고 있는 것이 민망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도 좋습니다."(151쪽)

물질적 풍요가 곧 행복이라고 가르치는 동화들, 여자에게 있어 아름다움이 궁극의 善이라고 가르치는 동화들, 뚝 잘라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인생사의 복잡함을 모호하게 숨겨버리는 동화들. 어쩌면 전래동화는 아이들에게 위험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더구나 디즈니 에니메이션은 여러모로 한 술 더 뜬다는 느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배우고, 두렵지만 나아가는 힘에 대해 배우고, 어른들이 말해주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배우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 다시 동화를 읽으며 섬뜩해하기도 하고, 뭔가 뜻모를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무심히 넘겼던 페이지에서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연히 집어든 책을 넘기며 동화 넘어의 인문학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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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新생활명품
윤광준 지음 / 오픈하우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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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보다 사물에 대한 이야기에 더 끌린다.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나름의 물성을 가지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사물들. 하지만 사람에게 보여지고 사용되면서 사물은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보인다. 사람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기도 하고, 보는 것만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형태미를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물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동시에 그것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흥미롭다.

이전에 <윤광준의 생활명품>을 읽으며 그의 글과 사진에 매료되었던 일이 있다. 그래서 지난번 책장 정리를 하며 많은 책들을 떠나보냈지만 그 책은 여전히 남겨두었다. 그러니 이번에 새로이 <윤광준의 新생활명품>이 나왔을 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물건과 어떤 이야기들을 들고 왔을지 기대를 가지며 읽게되었다.

저자 윤광준은 <남자의 물건>같은 재미난 책들과 방송출연 등으로 잘 알려진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의 절친(아마도?)이어서 서로의 책에 종종 등장한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닌데, 특히 이번 책에는 김정운의 추천의 글이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다. "장담컨대 <윤광준의 新생활명품>을 읽고 나면 '나만의 물건'을 사야 할 이유가 아주 버라이어티해진다"고 그는 쓰고있다. 대세인 미니멀리즘을 따르자면 물건을 버려야할 이유가 백만가지쯤 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물건을 사야할 이유가 버라이어티해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버리고 사는 것은 결국 한 줄에 꿰어진 구슬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감동이 없는 물건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감동을 주는 물건은 과감히 질러야 한다,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을 꾸려가기 위해선 적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의 품질이 최고 수준이 아니면 안 되지요." (61쪽)

많은 물건들이 등장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지지만 작가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소함의 가치'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사소해 보이는 물건일수록 제대로 만들기 어렵다. 소모품 취급을 받거나 정성을 쏟은 만큼 부가가치가 생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산다는 것은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과 뒹구는 일이다." (78쪽)

이런 맥락에서 이 책에는 소위 강소기업, 한우물 파는 기업의 사소하지만 완벽한 물건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위 중에서도 콧수염 가위, 신발이 아닌 신발깔창, 칼이 아닌 칼갈이, 와인이 아닌 와인따개, 마음까지 긁어준다는 등긁개.. 이런 것들이 당당히 주인공으로 실려있다. 마음에 쏙 드는 콧수염 가위를 찾기까지의 지난하고 피나는(진짜 피다) 그의 여정은 차라리 눈물겹다. 모든 신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깔창하나에 집중한 회사, 1965년부터 오직 깔창만을 연구하고 만들어온 회사, 그것도 한국 회사가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놀랍고 새로운 발견이었다. 외로움까지 달래줄만한 속시원한 등긁개를 앞에 두고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기도 하다.

"등긁개 우습게 보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랃 등 긁어준 사람이었느냐?" (89쪽)

이정도 패러디라면 안도현 시인도 껄껄 웃어넘길만 하지 않은가.

물건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결국 물건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것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읽다보면 '물건' 그 자체는 이 책의 주인공이기보다 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언가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고 탐구하는 일은 결국 그 대상에 상관없이 '산다는 것'에 대한 통찰로 이어지는 것 같다. 콧수엽 가위 편에서 다채로운 취향에 대한 이야기 끝에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를 좀스럽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게다. 대범하게 사는 척 하지 마라. 사이와 사이의 어떤 지점쯤 있을지 모르는 확신을 향해 다가서는 게 깊이다. 사이를 메우려는 노력은 한 사람의 전 인생일 수도 있다. 깊이가 없는 인간에게 나올 이야기란 없다."  (94쪽)

요즘 커피에 관심있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커피 관련 제품도 눈에 띄었는데 그 중 하나가 '몽벨' 커피 드리퍼이다. 4그램의 무게로 드리퍼와 필터를 겸하고 있어서 집 밖 언제 어디서든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는 이 물건, 막상 보면 굉장히 소박하다. 겨우 이런거야? 소개가 너무 거창한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오리지널과 짝퉁은 보기엔 비슷해도 천지차라는걸 우린 안다. 그는 말한다.

"단순함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살아보면 안다. 이 작은 물건을 만드는 데는 아마도 수십년의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 담긴 흔적을 통해 읽어낼 내용은 자못 숙연하다." (121쪽)

막상 자주 떠나진 못해도 늘 머리 한구석에 여행에 대한 생각을 달고 살아서인지 여행과 관련된 물건들이 개인적으로 관심을 끌었고, 몇가지는 정말 사고싶어졌다. 그 중 하나가 리모바 알루미늄 캐리어인데, 그의 유혹적인 설명글을 읽다보면 당장 지갑을 들고 나서고 싶을 지경이다.

"리모바 표면의 굴곡진 이미지는 융커스 전투기 동체에서 따왔다. 과거의 유물이 된 아름다운 비행기는 1950년 캐리어로 현신해 생명을 이어간다. 비행기나 캐리어나 온 세상을 떠돌긴 마찬가지다." (124쪽)

왠지 새가 되어 살아남은 공룡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다. 그렇다고 당장 사러 나설수는 없겠지... 하지만 '삼진어묵' 정도라면 당장 사러 나설 수 있다. 종종 사먹고 있기는 하지만, 진짜 부산어묵이라는 줄줄이 역사를 꿰어주니 오늘 저녁상에 올려야겠다. 그리고 며칠 내로 맛있는 연잎 밥을 먹으로 시내에도 다녀와야겠다.

물건이라는, 어찌보면 소소해보이는 소재 속에 다채롭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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