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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뺏는 사랑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7년 6월
평점 :
아낌없이 뺏다, 라는 뭔가 귀에 설고 익숙지 않은 표현을 제목으로 삼고 있는 것 만으로도 궁금증이 커진다. 끝까지 뺏기는 자는 누구? 바보이거나, 무엇엔가 홀려있거나?
뺏는 여자, 리아나는 변신에 재능이 있고 그것을 즐긴다. 반면 뺏기는 남자, 조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이다. 조금은 찌질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뭔가 일상을 뒤엎을 모험을 은밀히 꿈꾼다. "한 명은 확실히 죽였고, 다른 한 명은 죽였을 확률이 높은"(21쪽) 리아나를 20년 만에 우연히 바에서 마주친 조지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도발적이면서도 지극히 순진무구한 눈초리를 지녔던 그녀. 대학 신입생 당시의 그 꿈같던 한 학기의 시간, 하지만 그녀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던 시간들. 이 20년 전 이야기와 다시 그녀와 얽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불규칙하게 교차하며 소설은 이어진다.
이제 그녀는 철저히, 제목처럼 아낌없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시작한다. 20년 전에 이미 진짜 그녀와 마주쳤던 그는 그녀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조지는 그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믿고 싶었다."(134쪽) 그렇다. 조지는 어떻게든 그녀를 보호하고 그녀를 믿겠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품는 이런 근거없고 싶체없는 희망은 그를 그녀 범죄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결국 그녀의 계획들은 차근차근 수행되어가고, 더는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그는 생각한다. "지금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더는 리아나에게 속고 싶지 않다"(286쪽)라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그녀는 엄청난 다이아몬드와 함께 사라진다. 그에게는 다만 큰 트라우마만을 남긴 채로. 이제 그에게 "늘 상냥해 보였던 세상이 곧 참사라도 일어날 것만"(332쪽) 같다. 그리고 마침내 가닿은 조지의 결론은 그를 죽음 앞까지 끌어들인 것도, 그를 죽음에서 구해낸 것도 리아나였다는 것이다.
그는 20년 전,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또렷이 떠올린다. 그녀는 자기가 되고자 하는 어떤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 결코 잘못은 아니라고 말했었다. 누구나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거 아니냐고. 제법 설득력이 있다. 자신이 선택한 모습이 어쩌면 진짜 자신과 더 가까울 수도 있는거 아니냐는 리아나의 주장 말이다. 하지만 조지는 누구도 과거를 완전히 지울수는 없고, 과거를 외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가볍게 언쟁을 벌인다. 그녀는 20년 만에 또다른 이름으로 그 앞에 나타났고, 그는 20년 전과 똑같이 그녀라는 덫에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건의 현장을 홀로 다시 찾아간다. (이 장면은 책의 첫 부분에 프롤로그 형식으로 실려있다.) 그녀가 남겨두었을지 모르는 흔적을 찾아서. 그리고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라는 책 사이에서 엽서 한 장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엽서. 다만 그 곳이 멕시코 킨타나로주 툴룸의 마야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엽서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는 당연히 그 곳으로 향한다. 여전히 빼앗길 것이 남아서, 기꺼이 아낌없이 빼앗기기 위해서일까?
흔히 쓰는 표현 중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말이 있다. 일상이 무료할 때 약간의 가슴뛰는 일을 바라기도 하는데 위험한만큼 매력적이다. 소설 속에서 리아나와에게 휘둘리던 20년 전의 조지는 "희열을 느꼈다. (중략) 평생 바랐던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한 일에 말려들었기 때문이다. 마더 대학과 고향 집의 따분한 현실은 무미건조한 잿빛 과거로 물러났다." 라고 적고 있다. 위기와 기회가 한 몸이듯이 위험한 일은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20년만에 리아나가 다시 나타났을 때, 조지는 속속 다가오는 위험을 느끼고 주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발적으로 뚜벅뚜벅 그 속으로 걸어들어간 것이 아닐까. 무미건조한 일상을 깨는 매력적인 상황 속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치마폭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