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오름, 기행 -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을 위한 오름 40곳
손민호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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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해 전 제주 올레길을 완주한 일은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왼편으로 바다를 끼고 걷던 바닷길, 원시의 숲이 떠올랐던 곶자왈 숲길, 파종할 마늘을 쌓아두었던 황토빛 밭, 불쑥 감귤과 고구마를 건네줬던 사람들, 지쳐 모퉁이를 돌았을 때 마법처럼 나타났던 아늑한 카페... 아직도 선명한 장면장면이 참 많다. 그 중 하나로 오름에 올랐던 일도 빼놓을 수는 없다. 산처럼 우뚝하진 않아도 올라서면 제주의 선한 바람과 나즈막한 풍광을 단번에 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매 코스마다 두 개씩의 오름을 오르게 되어있어서 때론 오르막 앞에서 꾀가 나기도 했지만 오르고나면 절로 감탄사가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오름이 제주도에 무려 300 여개나 된다는걸 알고는 전부 올라가보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정복욕에 잠시 마음앓이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무리한 마음은 접었지만 제주도에 간다면 못오른 오름들을 몇 개 씩이라도 올라보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며칠전 오름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마음으로 책 <제주, 오름, 기행>을 읽게되었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여행 기자인 저자 손민호는 제주 오름과 15년의 인연을 맺고있다고 한다. 그에게 오름의 미학과 철학을 알려준 이는 김영갑이었다. 그는 제주도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래서 제주에 머물렀고 제주의 자연을 찍는 것에 자신을 바쳤던 사진작가이다. 올레길을 걷던 중 그의 갤러리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늦은 시간이라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지만 편안하고 널찍했던 앞마당과 뒤쪽에 있던 작고 소박한 까페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오름은 한라산처럼 우러러야하는 산이 아니라 '낮고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네' 같은 산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름은 오르는게 아니라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신경림,'산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모두 40곳의 오름을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고 있다. 화산, 사람, 숲, 올레 그리고 김영갑이 각 장을 대표하는 주제들이다. 예를 들어1장. "나다. 화산 그리고 오름"은 화산으로서의 오름의 면모를 잘 소개해 보여주고 마지막 장인 5장. "울다. 김영갑 그리고 오름"은 김영갑이 즐겨 들어 사진에 남겼던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오름들의 면면을 짐작케하는 사진들과 함께 등성이 마다에 새겨진 오름의 역사나 전설, 생태 등을 꼼꼼히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여행노트를 짧게 덧붙여 위치, 여행팁 등을 알려준다. 한편 한편 읽다보면 어떤 오름은 그 비경을 찾아서, 어떤 오름은 그 슬픈 역사를 보듬고 싶어서, 또 어떤 오름은 그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등등 온갖 이유로 40곳 모두를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성산 일출봉이다. 너무 유명한 관광지가 되버려서 오히려 그냥 지나쳐버렸던 곳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내가 너무 무지한 탓에 보물을 앞에 두고도 못알아본 꼴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옛날 누군가에겐 城같아 보였고, 누군가에겐 한 떨기 푸른 연꽃같아 보였던,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 감상 하나씩 남기고 갔던 곳, 그 곳에 깃든 전설만으로도 책 한권이 훌쩍 되어버리는 곳, 4.3 사건의 현장으로서 무려 445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 자살특공대의 전초기지로서 비극적 역사까지 품고 있는 곳. 다음에 제주에 가게된다면 오름중의 오름이라 할만한 성산의 존재감을 느끼며, 그 곳에 깃든 눈물을 기억하며 한걸음씩 오르고 싶다.

"한라산처럼 거대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비록 누추하나 나만의 세상 하나씩은 우리도 만들면서 산다. 하여 우리의 오름 여행은 정겹고 또 눈물겹다. 고만고만한 삶이 고만고만한 또 다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편안하고 또 서러울 뿐이다."

사실 예전에는 제주도에서는 한라산 만이, 그것도 정상만이 의미있어 보였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부터 주르륵 줄을 세우고 하나하나 정복해보고 싶기도 했고, 몇몇 곳을 무리하게 등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지만 마음 또한 크고 높은 곳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올려다보며 안달하고 애쓰기보다는 누군가와 나란히 가고자하는 마음이 바로 오름의 마음이란 걸 다시 떠올리며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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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맛 - 2017년 18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강영숙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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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상 문학상 작품집만큼은 쫓아 읽어왔는데, 어쩌다보니 최근들어서는 다양한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접하고 있다. 특히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은 애정하는 작품집이 되었다. 그리고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처음 읽게 되었는데, 이미 18회째라고 한다. 단편 수상집은 선택의 고민없이도 다양한 우리 시대의 우수 작가들과 우리 시대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참 좋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전반적으로 이 나라에 산다는, 이 시대에 산다는 아픔, 나아가 그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다양한 통증들을 담고 있다고 느껴졌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로 스쳐지나가지만 한사람 한사람을 들여다보면 상처나 흉터 하나쯤 없는 사람이 없은텐데... 나름의 전략으로 그것들을 치유하거나 보듬고 살아갈텐데... 그 모습들을 잠시 멈춰서 들여다보게 해주는 이야기들이었다. 공감을 강요하기보다는 그런 삶도 있다고 소설들은 조용히 들려준다.

대상작이자 표제작인 <어른의 맛>은 승신이라는 여자가 유부남과 몰래 만남을 갖는 장면과 옛 친구를 만나러 가는 장면. 이렇게 두 개의 이야기가 맞붙어있다. 승신이 등장한다는 것을 빼면 두 이야기는 전혀 이어져있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 독특했다. 두 사건의 연결점을 굳이 찾자면 하나는 미세먼지, 다른 하나는 조류독감이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사건의 흐름을 비극적으로 만드는 폭력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터뷰를 통해 작가는 "인간관계라는 게 바이러스나 먼지, 황사에 의해 깨지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인간도 인간의 의식도 의지도 관계도 실은 물질성 안에 갇혀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승신은 애들이 살면 살수록 더 비판적으로 변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삶이 사람들을 더 비판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떤 걸 배우면 우리는 어른이 되는걸까? 이처럼 삶에 대해 점점 비판적으로 되면, 더이상 할 수 없을만큼 비판적이 되면 우리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어른의 맛을 알게 되는 걸까? 작가는 '어른이 되어도 악몽과 불안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다.'고 말한다. 아이든, 어른의 맛을 알게된 어른이든 살아가는 일은 힘겨운 것이 아닐까. 어른이 되어도 불쑥불쑥 삶 속으로 뻗쳐들어오는 불안한 존재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고, 이 소설 속 인물들처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또한 끊임없이 노출되고 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설 속 승신처럼 쭈그리고 앉아 한움큼 흙을 집어먹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무언가를 애착 담요처럼 질질 끌고다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이 되는 일, 어른으로 살아가는 일,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는 일의 강박에 대해 생각케하는 소설이었다.

김금희 작가의 <오직 한 사람의 차지>는 출판과 책이 소재로 등장해서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젊은 날의 꿈이 조금씩 낡아져가고, 불태워지는 책더미와 함께 영원히 상실되어버리는 모습이 씁쓸했다. 그네들은 또 그렇게 한걸음 어른이 되는걸까.

마치 동면을 지속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던 시절은 다 잊은 봄날의 곰들처럼, 아니면 우리가 완전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상실뿐이라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세상의 흔한 아이들처럼.

조경란 작가의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는 무엇보다 까마귀의 등장이인상적이었다. 종종 그 많은 새들은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죽을까, 그리고 그 많은 죽은 새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보곤 하는데 이 소설에서 특별히 까마귀가 죽는 순간을 보는 장면의 묘사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다.

가깝지만 아주 높은 곳에 있던 새카만 새. 하나의 분명한 형상이었던 그것이 하강하던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짧앗다. 그러나 까마귀가 떨어진다. 라고 알아채던 순간 나를 긋고 지나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최근, 한국에서, 한국인에 의해 쓰여진 글들을 읽는 일은 한없이 긴 시간 속에서 마침 이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나와 나란히 공유하고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글을 쓰는 작가들은 각자 자신만의 사유의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글을 읽는 나와 가느다란 공감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래서 그들의 사유가 내 공간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오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곤 한다. 고전을 읽는 즐거움, 세계 유명 작가들의 독특한 문학을 엿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현대의 한국문학을 읽는 일 또한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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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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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논픽션도 당당히 문학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공예를 본격 예술과 비교해 조금 열등하게 보듯이, 논픽션도 본격 문학에 비해 조금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왔다. 언론기사나 보도자료 쯤의 실용을 위한 글... 하지만 논픽션만이 할 수 있는 '일', 논픽션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렉셰이비치의 작품들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되었다. 프랑스에서 2011년에 실재로 있었던 사건을 다각적인 면에서 꼼꼼히 취재하고 조사해서 쓴 이 글도 논픽션, 일명 다큐멘터리 소설이다.

위탁가정에서 자란 소녀 레티시아는 30대 초반에 이미 13번이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남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실종에서 시작된 사건은 토막살해사건으로 마무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사건은 프랑스의 여러 사회, 제도적인 문제들 드러내면서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매우 긴 시간동안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회자된다. 작가의 표현처럼 "많은 희생자들은 그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위험한 출소자에 대한 추적, 관리가 너무 허술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사법부를 공격하며 책임을 요구했다. 분명 정치적인 노림수도 있었을테고, 이에 반발한 사법부가 파업까지 강행했을 정도였다니 그 파장이 충분히 짐작된다. 결국 형법적용판사, 사회복귀 및 보고관찰 교정당국, 사회편입 카운슬러 등 촘촘한 제도망이 있었지만 만성적인 인력부족 등의 이유로 가해자 멜롱의 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정적인 언론에 대한 문제도 당연히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14장. '사회면 기사의 탄생'을 통해 작가는 언론과 기자들의 무례와 횡포를 다룬다. 소녀는 죽었고, 살해범은 감옥에 갇혔지만 언론에서 그 사건은 가라앉지 않았다. 소녀의 실종과 (얼마간) 발견되지 않는 시신을 둘러싼 서스펜스, 사건의 재빠른 정치화, 비탄에 빠진 가족들... 정말이지 언론에서 소비되기에 적당하지 않은가.

당연히도 이 르포의 중심에는 레티시아가 있다. 추운 겨울 새벽, 스쿠터와 플랫슈즈만을 남기고 사라진 레티시아. 가출? 자살? 납치? 가까운 네 명의 젊은이를 취조하는 것에서 시작된 수사의 과정과 이후 본격적인 수사와 수색, 용의자 신문 등이 꼼꼼하게 기록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주인공 레티시아의 19년 짧은 인생이 기록된다. 범죄자로 체포된 아버지, 우울증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해버린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리적 정서적 학대에 노출된 위험한 쌍둥이 자매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네다섯살의 나이에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는)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그녀들의 유년기에는 유년기를 이루는 요소가 없다. 지표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실되었다." (60쪽)

'레티시아'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아는 아이가 겪는 학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동학대에 관한 학술적인 사례와 표현들을 익히는 일과 확실하게 다른 체험이고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추상적 이론의 또다른 '사례'가 되버릴 레티시아의 이야기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먼나라에 살던,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이야기지만 한 권의 기록물을 통해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아무리 완벽을 담으려해도 '사회복지'라는 제도가 개인개인의 삶을 보살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쌍둥이의 문제가 법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된다. 그들은 거의 자동적인 절차에 따라 가석방된 아버지에게 맡겨졌다가, 다시 민법 375조와 그 부대조항에 따라 수용시설로 보내졌다가, 다시 위탁가정으로 보내졌다.

아동 수용시설에 대해서는 그 역사에서 시작해 본질까지를 파고들어간다. 18세기 일종의 출산 후 피임처럼 여겨졌던 영야유기, 이후 피해자인 아이는 잠재적 범죄자로 비춰지고, 마침내 만들어지기 시작한 수용시설들은 "아이들을 구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망가"뜨렸다고 작가는 쓰고있다. 또한 19세기 들어 여러 해결방안이 실행되었지만 "이는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드라마로, 그 골자를 이루는 단어는 '폭력'과 '고독'"이라고 작가는 쓰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자매는 처음으로 보호와 안정감, 외출, 운동 등을 향유할 수 있었고 서로를 의지하며 순종적인 모습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위탁가정으로 간 자매, 그들은 마침내 항구에 도달했을까? 그들을 맡은 파트롱씨는 열성적인 대리 아버지로서 확신이 강하고 모든것을 통제하려드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건 몇 달 뒤 그는 제시카를 포함한 위탁 아동 들에 대한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고,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너무나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레티시아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견주어볼 수 있다. 아동복지와 교도행정, 선동적 언론의 문제 뿐 아니라 끊어져버린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 대해서도 이 사건은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솔직히 프랑스에서의 삶은 내가 사는 '이 곳'에서와 많이 다를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곳은 '프랑스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다. 쉬운 표현을 빌려보자면 '사람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체념 비슷한 감정에 맥이 빠진다. 이런게 바로 범죄소설이나 스릴러가 아닌 '논픽션'이 가지는 힘이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을 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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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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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4부작 중 첫번째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자마자 궁금해졌던 레누와 릴라의 그 후 이야기는 그 두번째 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긴 시간에 걸친 이야기인만큼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살짝 부담스러운데 이 책은 앞 쪽에 등장인물 소개가 별도로 붙어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2권은 마치 제 1부의 이야기를 요약해 놓은 듯 보일만큼 친절한 등장인물 소개가 붙어있어서 따로 복사해놓고 보았더니 읽는 내내 유용했다.

 

 

 

마침내 다른 길로 들어서는 릴라의 화려한 결혼식 장면에서 끝났던 1부, 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등장으로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한 거친 풍랑의 예감이 확 밀려왔었는데...

"기대했던 난장판은 벌어지지 않았다. 릴라와 내가 미지의 세계로 도망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릴라는 내게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렇게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떠난 릴라는 스테파노의 또다른 페르소나와 마주하게 되고, '온 힘을 다해 그를 증오'한다. 한편 레누는 계속 학업을 이어가면서 릴라와의 관계와 거의 '사투'를 벌이는 듯 보인다. 릴라에게 매료되고, 릴라와 함께 할 때에 비로소 온전한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홀로 애태우고, 더이상 휘둘리지 않으려 결별을 결심했다가 다시 얽혀들어가고..., 자신에게는 없고 릴라에게는 있는 것에 대한 결핍감에 사로잡혀있는, 지나치게 생각(걱정)이 많은 레누의 모습이 안타까울만치 답답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릴라 역시 레누에게 뒤지고싶지 않은 마음이 매우 강했었다는게 살짝씩 언급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절망을 부여잡고 릴라는 결혼생활을, 레누는 학업을 힘겹게 이어간다.

"우리 둘 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삶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레누와 삶을 온 몸으로 경험하며 성장하는 릴라의 삶, 타인에게 자신의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때로는 자신을 속이는 레누와 타인에게는 쉽게 거짓을 말해도 자신의 감정에는 솔직한 릴라.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이 두가지 모습이 조금씩 섞여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둘은 양 극단을 보여주지만, 우리 안에는 이 두가지가 조금 애매하게 희석되어 있다는 생각이. 아무튼 이렇듯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면서도, 다른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둘만의 감정을 공유한다. 둘 사이의 이런 감정을 단순히 '우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1권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주로 릴라를 중심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그 중 인상깊었던 장면을 두 개만 꼽자면, 그 첫째는 레누가 어른들(특히 엄마들)의 세상에 시선을 주게 되는 장면이다.

"그날은 우리 동네 모든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그때 당시 이들의 나이는 기껏해야 나보다 열 살에서 스무 살 정도 많은 정도였다. ... 그런 변화가 시작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가사 일을 시작하면서 부터인가? 아니면 임신을 하면서? 남편에게 얻어맞기 시작하면서? 릴라도 눈치아 아주머니처럼 흉측해질까? ..."

다른 하나는 릴라가 초등학교 때의 선생님과 우연히 공원에서 마주치는 장면이다. 선생님은 <율리시스>를 읽고있는 릴라에게 말한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읽지 말아라. 상처만 줄 뿐이야." 그녀가 진학하지 못하고 그 빛나는 재능이 꺽여버린걸 여전히 안타까워하는 선생님에게 릴라는 말한다. 자신은 '아무나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결국 릴라의 결혼은 스테파노의 외도와 릴라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으면서 끝장이 나버리고, 레누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소설을 출판하는 것으로 2권이 끝난다. 겹겹의 불행과 불안으로 자신을 몰아넣었던 '결혼상태'에서 벗어난 릴라와 이제 어엿한 작가로 성장한 레누. 이 둘 앞에는 또 어떤 생의 굴곡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어지는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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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인간 - 유럽 이민노동자들의 경험에 대한 기록 존 버거 & 장 모르 도서
존 버거 지음, 장 모르 사진, 차미례 옮김 / 눈빛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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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소설가, 극작가, 다큐멘터리 작가이며 미술평론가이기도 한 존 버거, 이렇게 길게 쓸 수밖에 없는건 그가 그 어떤 분야에서도 부족함이나 소홀함이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존 버거가 쓴 글과 장 모르가 찍은 사진들을 엮어 유럽 이민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글과 사진은 서로 충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협력하지도 않으면서 각기 독립적으로 주제를 전달하는데 기여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70년대의 유럽 이야기이지만 그 시대의 이야기, 그들만의 이야기라고 읽어넘길 수 없는 극력한 현재성을 보여준다. 낡은 이야기같지만 결코 낡지않은 이야기, 낯선 곳의 이야기같지만 결코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미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어서이기도 하고, 여전히 전세계적으로 개발국가와 저개발국가 간의 문제 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더욱 곪아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쿠바인들은) 저개발하다 (to underdevelop)는 타동사가 하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경제가 저개발된 것은 그 나라 주변에서, 내부에서, 그나라를 향해서 행해지는 일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개발을 하는 대리인들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터키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다. 나무를 베고, 양을 키우는 목가적인 풍경? 그런건 어쩌면 들뜬 관광객의 눈으로 보는 '여행지'에서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건 가난의 살풍경이다. 적어도 존 버거의 눈에는 그랬다. 이 저개발 경제에 갇힌 한 남자는 이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할 결심을 한다.

그들에게 도시는 끊임없이 스며든다. 이야기 속에서, 공산품들과 언론, 음악을 통해서 도시가 한결같이 약속하는 것은 '개방성'이다. "그 개방성 안에 기회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러한 믿음이 "모든 의미에서 진실과는 아득히" 멀다는 것을.

그를 이민을 떠나도록 강요한 것은 빈곤 하나만은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 그는 애초에 자기가 태어났던 환경 속에는 결여되어 있는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의 상품이 유통되듯한 과정, 즉 하자없는 노동력을 증명하는 엄격한 신체검사와 이주의 과정을 거쳐 대도시로 향한다.

구체적인 한 사람에게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 경제하는 괴물이 어떻게 숨쉬는지를 보여준다.

1부 출발이 끝나고 2부 일이 시작된다.

"...착취의 가장 적나라한 형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은 지구 반대쪽 끝의 제3세계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지구 반대쪽'이라는 개념은 지리학상으로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해당된다. '파리시 교외의 판자촌' 같은 것은 거기에 속한다. 지하실에 파뭋혀서 잠자고 있는 이민들도 거기에 속한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노동시간과 비번시간만을 가지며, 거의 일정한 장소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에 종사한다.

"마르크스(1867년): ..공장 노동은 신경조직을 극도로 소모시키며, 근육의 다각적인 작용을 없애 버리고, 신체적 활동과 지적 활동의 양쪽 모두에 있어서 자유의 모든 인자를 몰수해 버린다.
헨리 포드(1922년): 나는 반복적인 노동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을 해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료 기술자들에게서 반복적인 노동이 몸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파괴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지만 우리들이 조사한 결과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은 왜 여기 오는 거죠? 돈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돈을 국외로 송금하잖아요. 그러니까 물가가 올라가는 거예요.
한 이민노동자의 말 : 당신들이 우리와 똑같은 돈을 벌고 싶다면, 우리와 똑같은 일을 하기만 하면 될 거요."

또한 이민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경험일 것이다. 그 존엄성은 타인에게 빼앗기기도 하고, 스스로의 현재를 부정함으로써 (단지 미래의 희망만으로 현재를 견디는 삶을 택하으로써) 스스로 박탈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대개의 이민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착취를 정치적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생각은 전통적이다. 그들의 변화에 대한 기대와 인간주의가 한데 함쳐져 개인과 가족을 위해 뭔가 이룩하고자 하는 희망이 된 것이다.
(중략)
터널 안에서 일하면서 각자는 달라진 ㅁ래에 대한 개인적인 환상 속에 다소간 갇혀 있다. 이것이 언어로 인한 고립감을 더욱 증가시킨다. 이것이 가끔씩은 일종의 무관심 - 지금 현재와 자아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하기도 한다.


마지막 3부 귀향,

집으로 돌아간다. 그는 즉각 온전한 그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가 옷가방과 짐꾸러미를 들고 기차에 오를 때, 그로부터 빼앗겨있던 모든 것이 그에게 돌아오게 된다. 독립, 남자의 성, 개인 주소, 목소리, 사랑할 기분, 나이 먹을 권리. 아무도 그런 것들을 호주머니에서 압수당했던 물건들을 돌려 주듯이 돌려 주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그의 운명에 의해서 그에게 돌려 주어진다."

이제 그는 돌아온 이민, 성공한 이민, 무언가을 성취한 사람으로서의 위상을 갖는다. 어쩌면 그가 있을 확실한 자리는 더 이상 그의 마을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는 진짜 고향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 마을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는 두 번 다시 그것을 자기가 떠나기 전의 것처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는 전과 다르게 보이고, 그도 전과 다르게 본다.

옮긴이의 말에서 역자는 이 책에 대해 "저개발국가 노동력의 제 1 세계로의 유입이라는 세계적 현상을 다큐멘트와 시적 묘사와 분석적 산문을 통해 다룬 존 버거의 독특한 기술방식은 배울 점이 많다."고 쓰고있다. 확실히 이 책은 매우 특별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내용을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제시하면서도 차갑지 않고, 오히려 뇌와 가슴까지를 뜨겁게 데워주는 글들만으로도 정말 멋진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다른 책, 아마도 소설을 머잖아 한 권쯤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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