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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티시아 - 인간의 종말
이반 자블론카 지음, 김윤진 옮김 / 알마 / 2017년 8월
평점 :
논픽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논픽션도 당당히 문학의 지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공예를 본격 예술과 비교해 조금 열등하게 보듯이, 논픽션도 본격 문학에 비해 조금 열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어왔다. 언론기사나 보도자료 쯤의 실용을 위한 글... 하지만 논픽션만이 할 수 있는 '일', 논픽션만이 줄 수 있는 '감동'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렉셰이비치의 작품들을 통해서 확실히 알게되었다. 프랑스에서 2011년에 실재로 있었던 사건을 다각적인 면에서 꼼꼼히 취재하고 조사해서 쓴 이 글도 논픽션, 일명 다큐멘터리 소설이다.
위탁가정에서 자란 소녀 레티시아는 30대 초반에 이미 13번이나 교도소를 드나들었던 남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실종에서 시작된 사건은 토막살해사건으로 마무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 사건은 프랑스의 여러 사회, 제도적인 문제들 드러내면서 논란을 낳았다. 그리고 매우 긴 시간동안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회자된다. 작가의 표현처럼 "많은 희생자들은 그와 같은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위험한 출소자에 대한 추적, 관리가 너무 허술했다는 점에서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사법부를 공격하며 책임을 요구했다. 분명 정치적인 노림수도 있었을테고, 이에 반발한 사법부가 파업까지 강행했을 정도였다니 그 파장이 충분히 짐작된다. 결국 형법적용판사, 사회복귀 및 보고관찰 교정당국, 사회편입 카운슬러 등 촘촘한 제도망이 있었지만 만성적인 인력부족 등의 이유로 가해자 멜롱의 살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정적인 언론에 대한 문제도 당연히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14장. '사회면 기사의 탄생'을 통해 작가는 언론과 기자들의 무례와 횡포를 다룬다. 소녀는 죽었고, 살해범은 감옥에 갇혔지만 언론에서 그 사건은 가라앉지 않았다. 소녀의 실종과 (얼마간) 발견되지 않는 시신을 둘러싼 서스펜스, 사건의 재빠른 정치화, 비탄에 빠진 가족들... 정말이지 언론에서 소비되기에 적당하지 않은가.
당연히도 이 르포의 중심에는 레티시아가 있다. 추운 겨울 새벽, 스쿠터와 플랫슈즈만을 남기고 사라진 레티시아. 가출? 자살? 납치? 가까운 네 명의 젊은이를 취조하는 것에서 시작된 수사의 과정과 이후 본격적인 수사와 수색, 용의자 신문 등이 꼼꼼하게 기록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주인공 레티시아의 19년 짧은 인생이 기록된다. 범죄자로 체포된 아버지, 우울증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해버린 어머니 사이에서 끊임없이 물리적 정서적 학대에 노출된 위험한 쌍둥이 자매 제시카와 레티시아는 네다섯살의 나이에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르는) 할머니 손에 맡겨진다.
"그녀들의 유년기에는 유년기를 이루는 요소가 없다. 지표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상실되었다." (60쪽)
'레티시아'라는 구체적인 이름을 아는 아이가 겪는 학대에 대한 이야기는 아동학대에 관한 학술적인 사례와 표현들을 익히는 일과 확실하게 다른 체험이고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추상적 이론의 또다른 '사례'가 되버릴 레티시아의 이야기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먼나라에 살던,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이야기지만 한 권의 기록물을 통해 내 마음을 흔들어댔다. 그리고 아무리 완벽을 담으려해도 '사회복지'라는 제도가 개인개인의 삶을 보살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쌍둥이의 문제가 법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된다. 그들은 거의 자동적인 절차에 따라 가석방된 아버지에게 맡겨졌다가, 다시 민법 375조와 그 부대조항에 따라 수용시설로 보내졌다가, 다시 위탁가정으로 보내졌다.
아동 수용시설에 대해서는 그 역사에서 시작해 본질까지를 파고들어간다. 18세기 일종의 출산 후 피임처럼 여겨졌던 영야유기, 이후 피해자인 아이는 잠재적 범죄자로 비춰지고, 마침내 만들어지기 시작한 수용시설들은 "아이들을 구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망가"뜨렸다고 작가는 쓰고있다. 또한 19세기 들어 여러 해결방안이 실행되었지만 "이는 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드라마로, 그 골자를 이루는 단어는 '폭력'과 '고독'"이라고 작가는 쓰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자매는 처음으로 보호와 안정감, 외출, 운동 등을 향유할 수 있었고 서로를 의지하며 순종적인 모습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위탁가정으로 간 자매, 그들은 마침내 항구에 도달했을까? 그들을 맡은 파트롱씨는 열성적인 대리 아버지로서 확신이 강하고 모든것을 통제하려드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건 몇 달 뒤 그는 제시카를 포함한 위탁 아동 들에 대한 성추행 혐의로 입건되고,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너무나 다양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레티시아 사건을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견주어볼 수 있다. 아동복지와 교도행정, 선동적 언론의 문제 뿐 아니라 끊어져버린 계층 이동의 사다리에 대해서도 이 사건은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들이다.
솔직히 프랑스에서의 삶은 내가 사는 '이 곳'에서와 많이 다를거라는 막연한 환상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곳은 '프랑스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다. 쉬운 표현을 빌려보자면 '사람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체념 비슷한 감정에 맥이 빠진다. 이런게 바로 범죄소설이나 스릴러가 아닌 '논픽션'이 가지는 힘이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그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을 보려는 노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