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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름, 기행 - 제주를 두 번째 여행하는 당신을 위한 오름 40곳
손민호 지음 / 북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두어해 전 제주 올레길을 완주한 일은 참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왼편으로 바다를 끼고 걷던 바닷길, 원시의 숲이 떠올랐던 곶자왈 숲길, 파종할 마늘을 쌓아두었던 황토빛 밭, 불쑥 감귤과 고구마를 건네줬던 사람들, 지쳐 모퉁이를 돌았을 때 마법처럼 나타났던 아늑한 카페... 아직도 선명한 장면장면이 참 많다. 그 중 하나로 오름에 올랐던 일도 빼놓을 수는 없다. 산처럼 우뚝하진 않아도 올라서면 제주의 선한 바람과 나즈막한 풍광을 단번에 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매 코스마다 두 개씩의 오름을 오르게 되어있어서 때론 오르막 앞에서 꾀가 나기도 했지만 오르고나면 절로 감탄사가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멋진 오름이 제주도에 무려 300 여개나 된다는걸 알고는 전부 올라가보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정복욕에 잠시 마음앓이를 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무리한 마음은 접었지만 제주도에 간다면 못오른 오름들을 몇 개 씩이라도 올라보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며칠전 오름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마음으로 책 <제주, 오름, 기행>을 읽게되었다.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여행 기자인 저자 손민호는 제주 오름과 15년의 인연을 맺고있다고 한다. 그에게 오름의 미학과 철학을 알려준 이는 김영갑이었다. 그는 제주도를 너무도 사랑했고, 그래서 제주에 머물렀고 제주의 자연을 찍는 것에 자신을 바쳤던 사진작가이다. 올레길을 걷던 중 그의 갤러리에 들렀던 기억이 난다. 늦은 시간이라 내부 관람은 하지 못했지만 편안하고 널찍했던 앞마당과 뒤쪽에 있던 작고 소박한 까페가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들어가는 말에서 오름은 한라산처럼 우러러야하는 산이 아니라 '낮고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네' 같은 산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름은 오르는게 아니라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신경림,'산에 대하여')
이 책에서는 모두 40곳의 오름을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고 있다. 화산, 사람, 숲, 올레 그리고 김영갑이 각 장을 대표하는 주제들이다. 예를 들어1장. "나다. 화산 그리고 오름"은 화산으로서의 오름의 면모를 잘 소개해 보여주고 마지막 장인 5장. "울다. 김영갑 그리고 오름"은 김영갑이 즐겨 들어 사진에 남겼던 곳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오름들의 면면을 짐작케하는 사진들과 함께 등성이 마다에 새겨진 오름의 역사나 전설, 생태 등을 꼼꼼히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여행노트를 짧게 덧붙여 위치, 여행팁 등을 알려준다. 한편 한편 읽다보면 어떤 오름은 그 비경을 찾아서, 어떤 오름은 그 슬픈 역사를 보듬고 싶어서, 또 어떤 오름은 그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등등 온갖 이유로 40곳 모두를 찾아가보고 싶어진다.
가장 먼저 소개된 곳은 성산 일출봉이다. 너무 유명한 관광지가 되버려서 오히려 그냥 지나쳐버렸던 곳이었는데 책을 읽으며 내가 너무 무지한 탓에 보물을 앞에 두고도 못알아본 꼴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옛날 누군가에겐 城같아 보였고, 누군가에겐 한 떨기 푸른 연꽃같아 보였던, 내로라하는 문장가들이 감상 하나씩 남기고 갔던 곳, 그 곳에 깃든 전설만으로도 책 한권이 훌쩍 되어버리는 곳, 4.3 사건의 현장으로서 무려 445명이 희생되었고, 일본군 자살특공대의 전초기지로서 비극적 역사까지 품고 있는 곳. 다음에 제주에 가게된다면 오름중의 오름이라 할만한 성산의 존재감을 느끼며, 그 곳에 깃든 눈물을 기억하며 한걸음씩 오르고 싶다.
"한라산처럼 거대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비록 누추하나 나만의 세상 하나씩은 우리도 만들면서 산다. 하여 우리의 오름 여행은 정겹고 또 눈물겹다. 고만고만한 삶이 고만고만한 또 다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니 편안하고 또 서러울 뿐이다."
사실 예전에는 제주도에서는 한라산 만이, 그것도 정상만이 의미있어 보였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부터 주르륵 줄을 세우고 하나하나 정복해보고 싶기도 했고, 몇몇 곳을 무리하게 등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지만 마음 또한 크고 높은 곳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올려다보며 안달하고 애쓰기보다는 누군가와 나란히 가고자하는 마음이 바로 오름의 마음이란 걸 다시 떠올리며 책장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