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준비의 기술
박재영 지음 / 글항아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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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담 좋은 작가의 책 한 권을 기분 좋게 읽었다. 여행의 기술이 아니라 여행'준비'의 기술이다. 여행을 가는 것은 돈과 시간, 체력과 바이러스가 모두 따라 주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여행 준비는 아무 것도 갖춰져 있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알랭 드 보통이 <여행의 기술>을 쓰고,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를 썼지만, 다행히 아무도 여행 준비의 기술을 쓰지 않은 덕분에 자신이 이 책을 쓸 수 있었다는 너스레와 함께 작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국어 공부, 관련된 책 찾아 읽기, 평소에 끌리는 곳을 찾아 구글맵에 표시하기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평범한 여행준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평범한 것들이 작가의 글솜씨 덕분에 어마어마하게 흥미진진하게 보인다. 결국 읽을 만한 책을 쓴다는 것은 대단하고 특별한 글감을 보유하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좋은 얼개 속에 이야기를 펼치는 기술에 달려 있는 것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중에 가장 와 닿았던 것은 여행 일정을 어떻게 구성하는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여행지가 내게도 좋은 여행지라는 법은 없으니 본인이 좋아하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일정을 구성하라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지만 여행을 떠나면 그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내가 여기 다시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르고, 돈과 시간을 쏟아부어 여기까지 왔는데 후회나 미련을 남기면 안된다는 본전 의식이 강력하게 발동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것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쏠리는 관심에 비유한다.


이건 근본적으로 '타인의 관심사'이고 몰라도 대세에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인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걸 클릭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빼앗긴다. 145


유명한 관광지라고 해서 꼭 가야 한다는 법 있나. 게다가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그 유명 관광지는 알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곳도 아니다. 평소에는 존재도 몰랐다가 가이드북에서 처음 발견한 장소에 집착할 이유가 있을까. 어차피 가이드북에 별표 다섯개 붙어 있는 곳이라고 다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어디 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 사진 말고는 남는 것도 없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유명 관광지보다는 내 마음이 왠지 끌리는 곳, 그곳을 선택했을 때 기억에 훨씬 더 오래 남는다. 좋은 곳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곳이 좋은 곳이다. 203


어디 여행뿐이겠는가.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베스트셀러를 읽고, 핫스팟을 방문하고, 유행하는 옷을 입는 것도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라고 바꿔말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백화점에 걸려 있는 옷들은 편집샵에 걸려 있는 옷들에 비해 별 매력이 없다. 이유는 백화점에는 '최대공약수의 옷'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대충은 좋아할 만한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최대공약수의 옷이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서 추천하는 것들도 대체로 비슷하다. 실패하지 않겠지만, 실패를 줄이는 만큼 '내게 더 좋은 것'과 만날 가능성도 함께 줄어든다. 실패는 없겠지만, 매력도 함께 없어진다.


남들이 다들 좋다는 것을 외면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겠다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엄청 좋은 것이었다하더라도 다른 것을 선택할 당시의 나를 인정하고 그 순간의 마음을 포용하는 용기.


더 필요한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기 위해 이것저것 탐색해보고 시도해 보는 노력. 우리의 하루하루는 엄청나게 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선택들이 내게 좋은 것들로 수렴되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항상 남의 선택, 다수의 선택을 따르다보면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을 찾는 감각 자체가 쇠퇴해버린다. 그러니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믿고 따라가는 것을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중국집에는 짬짜면이 있지만 인생에는, 그리고 여행에는 짬짜면이 없다. 유명 관광지가 타인의 선택이라면, 왠지 내가 하고 싶고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나의 선택이다. 내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인생에서 여행 스케줄 정도는 내 맘대로 짜도 된다. 203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망설여질 때 짬짜면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지만, 너는 짜장면, 나는 짬뽕, 이렇게 시켜서 나눠 먹는 방법도 있지만, 이제부터는 좀더 분명하게 선택을 해보면 어떨까? 이왕이면 제3의 다른 메뉴를 선택하는 방법도 있고. 그러다 실패하면 어떤가. 고작 한끼일 뿐인 것을.


망설임도 습관이고,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위임하는 것도 습관이라면,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도 습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다만 주의할 것은, 그게 취향을 위한 취향은 아닌지 되물어보아야 한다는 것. 정말 그게 좋은 것인지, 남들이 좋다고 하니 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 혹시 허세나 보상심리는 아닌지, 촘촘하게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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