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작가 '바바라 오코너'의 작품, '위시'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가족소설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찰리의 상황이 우울하고 침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흡인력과 웃음 요소들을 가진다. 그건 아마도 주인공 찰리와 그의 친구 하워드, 그리고 위시본(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주인공 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기도하고 행운을 빈다. 처음 부분을 보았들때 워낙 소원을 많이 빌어서 전부 다른 소원이인가 싶었다. 그런데 단 한가지 소원이라고 말한다. 자신에게는 한가지 소원 밖에 없다고 한다.
아빠는 교도소에 수감중이고 엄마는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보살핌이 필요한 찰리는 이모댁에 보내 지게 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여기에 나오는 거스와 버서는 아빠와 엄마와는 반대의 성격과 삶을 산다. 매일 싸우고 욕하고 미워하는 엄마와 아빠만 보면서 이모와 이모부인 거스와 버서는 참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여기에 나오는 하워드는 참 재미있고 독특한 친구로 나온다. 다리는 쩔뚝거리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때도 있지만 친절하고 온순하고 착한 아이로 나온다. 찰리는 아주 분노에 찬 성질 더러운 쌈닭이다. 듣기 거북한 얘기에는 언제나 거친 말과 행동으로 응수 해준다. 여기에서 소설이 주는 재미를 십분 발휘된 것 같다.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들. 그런 대비된 성격들을 공존시키고, 관계를 이끌면서 우리에게서 많은 재미를 선사한다. 나 또한 중간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는 경우들을 무의식중에 느끼고 있었다.
찰리의 기억! 엄마에 대한 생생한 기억, 본문에서 살짝 보여줄까 한다. -----하워드에게 얘기하는 장면-----
'내가 갈아 입을 옷은 있는지, 학교는 빠지지 않고 가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어두 컴컴한 방 안에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우는 엄마를 봤을 때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얘기했다.' ------------62쪽
공간이 주는 공포도 무섭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어두운 에너지의 공포도 무섭다. 찰리는 아직 너무도 어린애이다. 공간과 엄마의 모습에서 오는 공포가 얼마나 무서웠을까 난 짐작만 할 뿐이다. 나 어릴적에,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 때 인 것 같다. 엄마가 심하게 아프셨다. 엄마는 마음이 약해 지셨는지 몇 번을 나에게 되뇌이셨다. '내가 잘못 되면, 내가 빨리 가면,' ------- 난 옆에서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고 있었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 한 공포심이였다. 어린 나이에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사랑의 깊이 만큼 두려움도 크게 들어왔다. 난 그랬다.----
이 소설 속에서는 우울한 느낌, 분노에 찬 찰리, 그런 모습들을 오래 끌고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독자에게 피곤도를 덜 느끼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화제의 전환은 찰리의 소원 빌기에서 비롯 된다고 생각한다. 이루어지지 않는 소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빈다. 그것도 이상한 형태로 빈다. 까칠하고 분노에 찬 찰리는 언제나 그렇다. 분노에 찬 모습들이 좀 더 지나면 엄마의 경우 처럼 우울증에 빠지기 쉽지만, 찰리는 그렇지 않다. 소원 빌기를 통해서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다림이란, 이루어 지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이 있지만 그 뒤에는 또 다시 기다림이란 설레임과 희망, 기쁨이 존재한다. 아주 아이러니하고 모호한 속성의 것 들이다. 이런 모호함이 이 소설의 중반 이후를 더욱 재미 있게 만든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개, 위시본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개. 이 개는 떠돌이 개에다가 싸움기질이 있는 사나운 개이다. 작가는 이 개를 통해서 찰리를 동일시 만든다. 아주 교묘하게 겹쳐 만든다. 난 계속해서 개가 궁금해서 이 책을 놓지 못 했다. '언제쯤 개가 잡히는 거지? 언제쯤 찰리가 키울 수 있는 거지? 이 개의 사연이 뭐길래 떠돌이에다가 사나운 개가 되었지?'등등 궁금했다. 하워드와 찰리의 끈질긴 잡기 노력 덕분인지 위시본은 찰리의 개가 된다. 찰리는 위시본을 통해 자신을 돌아 본다. 가족의 사랑이 뭔지 몰랐던 찰리는 이모댁에 오면서 점점 알아간다. 그러면서 그러한 가족의 사랑, 즉 자신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위시본에게 전달해 준다.
좋은 구절이 있어 소개 할까 한다.
과연 네잎클로버가 하나 보였다. 하지만 나는 꺾지 않았다. 네잎클로버를 꺾으면 행운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꺾지 않고 두면 거기에 대고 소원을 빌 수 있기에 그렇게 했다. --------------132쪽
찰리의 소원빌기에 대해선 복잡한 생각이든다. 지은이의 마음을 다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 아무래도 '마음의 위안'인 것 같다. 자신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할 수 없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소원 빌기가 아닐까? 그래서 매일 그렇게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소원을 그렇게 빌었는지 모른다. 찰리의 애뜻함과 안쓰러움, 귀여움이 고스란히 이 소설에 묻어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찰리의 심적 변화를 들 수 있다. 비록 까칠한 성격은 변하지 않을지 몰라도 찰리의 가슴속에 없던 사랑의 꽃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보다 소소하게 조금씩 다가오는 감동이 더욱 좋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